삐삐삐삐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나는 이미 중간문을 열고 나와 현관에 서있다. 철컥 소리를 내면서 아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상기된 표정의 아이와 나는 마주했다.
“엄마, 나 이제 선생님이 수학 잘한데!” 이 말을 할 때 아이의 눈은 별이 박힌 듯 반짝거렸다. 감정의 동요 탓인지 날씨 탓인지 아이의 볼은 붉은 사과처럼 발그레했다. 곧 아이의 눈은 눈물을 담고 글썽거렸는데 “엄마, 문 앞에서 넘어졌는데 발이 아파” 눈물 한 방울을 바닥에 떨어뜨린 아이는 신발을 벗지 못했다. 아이의 발에서 딱딱한 재질의 하늘색 겨울 운동화를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아이를 부축해 방에 앉힌 후 냉동실에 물에 젖은 수건을 넣었다. 차가워진 수건으로 아이의 오른쪽 발목 부위를 감쌌다. 복숭아뼈 부위가 알사탕처럼 부어올랐다. 냉찜질 후 부종은 가라앉았으나 발이 아프다고 아이는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뼈에 이상은 없으나 만일을 대비해서 일주일 정도 반깁스 상태를 유지하자고 의사가 말했다. 반깁스는 벨크로 형식의 종아리까지 감싸는 탄력 보호대다. 반깁스 보호대를 착용한 아이는 온 집안을 절뚝이며 돌아다녔다.
오른쪽 어깨가 기우뚱해지며 비틀어지는 아이의 하체로 내 시선이 향했다. 그 모습을 보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만히 좀 있어' 소리치고 싶은 이유가 아이의 빠른 회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절뚝이며 걷는 그 모습 자체에 있다는 것을. 한시적이라도 절뚝이는 아이의 모습은 근심과 염려라는 괴로움을 안겼다. 표출하면 '화'가 될 괴로움.
또 하나 나를 괴롭게 한 것은 내가 관여하지 못할 시간에 대한 상상에 있었다. 겨울 해 속에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선생님께 칭찬받은 기쁜 마음으로 아이는 십여 분 거리 집으로 향했다. 그 기쁜 마음을 간직한 채 아이는 넘어졌다. 아이가 넘어지며 기쁨은 멀어지고 통증만 남았다는 것도 속상했으나 만약에 아이가 학교 근처에서 넘어졌다면. 실재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하며 나는 끔찍해졌다. 십여 분 거리를 절뚝거리며 차가운 공기 속에서 혼자 걸어오는 아이의 모습이 있었던 일처럼 마음에 떠올랐다.
아이를 잃어버린 엄마가 초조해하다가 다시 아이가 나타났을 때 ‘잘 돌아왔다’는 포옹이 아니라 아이를 때리며 어디 갔었냐고 화를 내는 장면을 접한다. 아이가 잘못됐을 거라는 상상은 이성을 마비시킨다. 상상이라 하더라도 사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아이가 잘못됐(될)을 수도 있다는 상상 속에 바싹바싹 타들어가는 공포. 양육은 무거움 짐이자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이다. 인간적인 경계를 뛰어넘고 ‘나’라는 한정된 존재를 부순다.
진회색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기쁨으로 상기된 아이의 표정과 통증으로 눈물을 글썽이는 아이의 표정은 뇌리에 남았다. 내가 관여하지 못할 아이의 시간이 각인됐다. 이 시간은 아이가 성장할수록 늘어날 거고 언젠가는 아이 혼자 겨울 해 아래서 차가운 공기를 마시며 절뚝이는 상황을 마주할 때가 올 거다.(이런 상황을 상상할 때면 나는 이미 아이의 곤란함 속에 있는 듯 착각한다. 불안을 일으키는 이런 상상은 아이와 관련될 때 증폭된다.)
내 불안한 감정으로 아이에게 짐스럽지 않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이성을 제대로 사용하여 상상에 의해 아이를 옥죄지 않기 위해서는. 아이와 관련되어 보이지만 실제로 아이와 관련되지 않는 나와 관련된 감정들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