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술이 풀리는 시간

by 북남북녀

주술이 풀리는 시간은 언제일까. 벗어나려는 용기가 자연스럽게 차오를 때일까(낯 모르는 왕자의 키스보다는 이쪽이 확실할 것 같기는 하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 맏이로 태어난 엄마가 언제부터 고기를 먹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린 시절에 바닷가에서 조개를 잡는 게 힘들어 울었다는 엄마는 바지락 칼국수에서는 바지락을 제외한 칼국수 면만 먹고, 유일하게 먹는 동물성 음식인 짜장면에서는 소스 국물이 묻은 면만 먹는다. 엄마가 다 먹었다고 내놓는 짜장 그릇에서는 수북하게 남은 짜장 건더기를 볼 수 있다.


주말이면 동네 어른들은 평상 위에서 라면도 끓여먹고 고기도 구워 먹었다. 옆 공터에서는 오리도 길렀기에 몸보신이 필요하다 싶을 때는 오리 한 마리를 잡아 생피를 마시고 생간을 소금에 찍어 먹는 어른들을 볼 수 있었다. 남은 오리 살은 술안주용으로 소주와 함께 어른들의 상위에 올랐다.


고기 구워지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지는 날에는 엄마와 동네 아주머니들이 갓 지은 밥과 각자의 집에서 가져온 반찬들을 남자 어른들이 앉은 평상 위로 날랐다. 아이들은 어른들 주변에서 어울려 놀다가 남자 어른들이 먹고 남은 밥과 반찬을 여성 어른들 속에 섞여 함께 먹었다.


그날은 돼지갈비쯤 되는 음식이 구워지던 날인 듯싶다. 간장 조린 달큼한 냄새가 공중에 떠다녔다. 평상 주변에서 놀던 내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 소리가 나고 입에서는 침이 꼴깍꼴깍 넘어갔다. 동네 아저씨 한 분이 거 애들도 고기 좀 주지요, 하더니 나에게 이리 오라며 손짓했다. 아저씨의 다른 손에는 고기 한 점이 젓가락에 들려 있었다. 아저씨에게 가서 고기를 받아먹으면 혼날 것 같아서 엄마를 쳐다봤다. 역시나 엄마는 쟤는 고기 안 먹어요,라고 말하며 나에게 다른 곳에 가 놀라 했다. 고기 안 먹는 아이가 된 나는 아저씨를 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이런 상황은 몇 번 반복됐고 나는 스스로 “고기 안 먹어요, 못 먹어요”말하게 됐다. 고기 안 먹는 아이라는 주술에 균열이 생긴 것은 그로부터 삼, 사 년 지난 초등학교 4학년쯤이다.


감기에 걸리더라도 별다른 처치 없이 하루쯤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진다. 어린 시절 앓았던 귀앓이(중이염)도 아이들은 한 번쯤 다 귀앓이 한다는 엄마 말에 지나가는 일 정도로 알았다. 귀에서 고름이 나오고 얼굴이 찡그려지는 통증이 있었으나 일상생활을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겨울에서 봄이 가까운 때에 삼일 정도는 누워있어야만 하는 감기에 걸렸다. 일어나 움직이려 하면 구토증이 일어나 다시 눕는 수밖에 없었다. 누워 있는 것이 갑갑해 골목길로 나갔다가 어지러워서 걷지 못하고 서늘한 벽에 기대어 햇빛 아래서 가만히 앉아 있던 기억이 있다.


이 정도 심하게 앓고 났더니 용기가 생겼다. 떡볶이와 순대를 두고 “저, 이제 순대 먹을 수 있어요”말할 수 있는 용기가. ‘고기 안 먹는 아이’라는 주술에 걸린 나는 언니와 동생이 떡볶이에 순대를 사 와서 먹을 때면 떡볶이만 먹으며 순대를 힐끔거렸다. 가족 중 한 명이 먹어보라 하면 “나 고기 안 먹잖아”말하며 고개만 도리도리 했다.


먹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먹고 싶었는데), ‘고기 안 먹는 아이’라는 말을 벗어나기도 어려웠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 먹기에도 모자란 값비싼 고기를 자신의 아이에게 먹이는 것이 염치없는 일처럼 여겨져 엄마가 아저씨에게 둘러댄 말인 듯싶은데(옷이든지 음식이든지 무엇이든지 부족한 시절이었으니). 고기를 먹는 것이 엄마의 말을 거역하는 것처럼 느껴지고(배신자가 되는 듯이) 고기를 안 먹는 엄마를 따라 고기를 안 먹는 딸이 되어야만 할 것 같은 정신적인 압박감이 내게는 만들어진 듯싶다.


순대 먹을 용기를 낸 후로도 고기 먹는 용기를 내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순대는 먹지만 고기는 안 먹는 아이였고, 학생이었고, 직장인이었다. “나 이제 고기 먹을 수 있어”말한 것은 결혼 후 야식으로 치킨과 맥주가 일상이 됐을 때다.(정신적인 탯줄이 끊긴 것이 이쯤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고기를 먹지 않아도 고기 요리를 뚝딱 해내는 엄마는 이번 설에도 LA갈비를 재우느라 밤잠을 설쳤다고 말하며 웃는다. 고기의 맛은 핏물을 제거하는 것이 전부라면서. 엄마의 갈비는 그 정성 때문인지 사위들과 딸들이 명절 때마다 엄지 척을 올리는 요리 중 하나가 됐고, 엄마가 차려주는 윤기 나는 솥 밥과 부드러운 고기로 아이들과 맛있는 한때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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