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겠다는 열정은 본질적인 면에서 살인적이다.”
미쉬낀 공작은 병환으로 스위스에서 요양하다가 고국인 러시아로 돌아온다. 그가 돌아온 러시아는 빈민은 굶어 죽고 아기는 얼어 죽는 곳이다. 돈이 없으면 생명에 위협을 받고 노예 같은 생활에 처해지기에 지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돈벌이에 뛰어든다. 돈 때문에 결혼하고 돈 때문에 친구를 죽일 수도 있다. 인색한 고리대금업이 성행한다. 사회에서 한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에 연민을 보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지위 향상과 쾌락 추구에 몰두한다.
이러한 곳에서 미쉬낀 공작은 사기꾼에게 정당함을 변호해 주고 운 좋게 받은 유산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자신들과 같은 야심이나 탐욕을 보이지 않는 미쉬낀 공작을 주변인들은 사랑하면서 증오한다.(공작 앞에서는 자신들이 수치스럽기에)
부도덕이 만연하고 혼탁한 세상에서 고결한 빛을 내는 미쉬낀 공작은 비웃음을 당하는 위치에 놓이며, 미쉬낀 공작이 연민을 느끼는 여인 나스따시야, 나스따시야에게 집착하는 거부 로고진, 미쉬낀 공작과 사랑했으나 엇갈린 인연인 아글라야, 세상의 구원자가 되고 싶으나 폐병으로 죽어가며 저주하는 이뽈리뜨, 사람들의 이중성과 야심, 타락과 일그러짐, 거짓과 술수를 대표하는 레베제프 등의 주변 인물을 통하여 시대의 갈등과 상황을 묘사한다.
공작이 연민을 느끼며 구해주고 싶어 하는 여인 나스따시야는 악의로 가득 찬 여자이다. 그녀가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운 나쁘게 어릴 때 고아가 되었지만 그녀 역시 꿈을 간직한 소녀였을 거고, 교양을 쌓으며 미래를 향하는 고결한 여인이고 싶었을 거다. 비극은 그녀의 외모가 눈에 띄게 뛰어났다는 것이고 세상은 그런 그녀를 보호하기보다는 파괴하길 원했다는 거다.
후견인과 같은 부호 또쯔끼에게 순결을 빼앗긴 나스따시야는 세상으로 인하여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라 심판당한다. 세상은 빼앗은 자를 지탄하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나스따시야에게 돌을 던진다. 사회에서 굴욕적인 상황에 처한 그녀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악의로 다시 사회로 되돌린다.
나스따시야에게 남은 것은 수치심과 복수심과 악의다. 이것이 그녀를 살게 한다. 미쉬낀 공작은 사람들이 보는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하고 악의에 가득 찬 나스따시야가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자신’으로 올곧게 서 있는 나스따시야를 본다. 미쉬낀 공작에게 나스따시야는 세상 속에서 상처 입는 불행한 여인일 뿐이다.("세상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거나 그 여인에 대한 사랑의 가능성을 예감하고 있는데, 그녀가 쇠사슬에 묶여서 철창 안에 있다면, 또 간수의 몽둥이 아래서 끊임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면 무슨 생각이 들겠는가?") 미쉬낀 공작의 본질을 뚫는 연민으로 나스따시야가 흔들리기는 하지만 나스따시야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순간 그녀는 다시 사회에서 굴욕적인 상황에 처해져야 한다.
미쉬낀 공작은 나스따시야의 상처와 악의를 흡수하고, 나스따시야에 대한 집착으로 죽어가는 거부 로고진의 상처를 흡수하며, 구원자의 환상에 취해있는 시한부 인생 이뽈리뜨의 좌절을 흡수한다. 미쉬낀 공작은 주변인들의 상처와 좌절과 악의를 자신 안에 흡수한다. 비웃음과 조롱에 악의로 되갚지 않는다. 미쉬낀 공작에게 세상은 상처 입은 여인 같은 곳으로 연민이 필요한 곳일 뿐이다.(그가 나스따시야를 외면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미쉬낀 공작과 연인 관계였던 아달리야는 질투에 눈이 멀어 끝내 그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자아와 돈이 결합하면 강력해진다. 세상은 비틀려진 자아의 투영이며 돈에 대한 야심으로 타락해가는 곳이다. 가진 자들의 교양이라는 것은 그러한 타락을 형식에 의해 교묘하게 가릴 뿐이다.
도스토옙스키는 한스 홀바인의 <무덤 속의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에서 영감을 받았다. <무덤 속의 죽은 그리스도의 시신>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상처(상해)를 조명한다.
구원은 자아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자아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이뽈리뜨, 아달리야의 실패에서 엿보인다. 이뽈리뜨는 자신이 구원자가 되어 칭송받기 원하며 아달리야는 미쉬킨 공작의 고결함을 알아보는 눈이 있었으나 질투와 소유욕으로 괴로움에 처한다.) 자아를 벗어나 신의 고결함을 간직하고 있는, 그리스도를 닮은 이(미쉬낀 공작)에 의해 가능해진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미쉬낀 공작은 오랜 병환 탓인지 인간적인 자아가 보이지 않으며(학습되지 않았으며) 신적인 본성에 가까이 있다. 관습과 질서에서 벗어나는 미쉬낀 공작을 사람들은 ‘백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역자(김근식) 해설에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닮은꼴이다. 남의 눈을 기피하며 의심쩍어하는 표정에 우울한 눈빛을 한 로고진의 아버지는 정신적인 면에서 로고진의 원형 그대로이다. 그는 물론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살인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돈을 벌겠다는 열정은 본질적인 면에서 살인적이다."p950. 백치 하. 열린 책들.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