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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다친 사람들

최은영 <쇼코의 미소>

by 북남북녀

어느 정도의 우울은 약 없이 버텨내는 것을 선호한다. 사람이 약을 조절해야지 약이 사람을 조절하면 안 되는 거라고. 그러면 어느 땐가는 분명 탈이 나는 거라고. 술이 그렇듯, 사랑이 그렇듯이.


마음이 다쳐서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할아버지, 아픈 동생과 동물에 감정을 이입해 살아가는 케냐인.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할머니마저 돌아가신 순애 언니. 순애 언니는 세상의 이데올로기에 남편마저 장애를 입었다. 다 퍼주던 착한 심성에서 아귀아귀 닭살을 혼자 발라먹는 사람으로 변하기까지.


마로니에 공원 담벼락 위에 앉아 여한 없이 노래를 부르던 스물, 스물하나와 약물 부작용으로 가만히 서있다가도 무릎이 꺾여 주저앉는 스물넷. 언젠가는 도시로 나갈 거고, 언젠가는 한국을 여행할 거고 언젠가는 남자와도 함께 살아볼 거고, 무엇이든 해보리라고 얘기하던 쇼코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한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실금 하나 가지 않을 정도로 세상은 견고하고, 조롱하고 차별하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생은 시시때때로 침해당하고 괴롭힘 당하고 죽임 당한다. 이유를 모르겠는 고통이 어느 날 갑자기 발생한다.


생을 어느 만큼 살아낸 노인이든지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든지 상처 많은 사람은 단절을 택한다.

투정 없이 단절을 받아들인다. 사랑 아닌 척, 사랑을 숨기는 말을 내뱉고 싶은 이에게는 사랑조차도 자신을 짓누르는 무엇이 된다. 사랑은 견디기 힘들다. 사랑으로 침범당해도 아프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추해서 또 아프다.


무정하고 폭력적이며 친절하지 않은 세상에서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 (사라져 갈 온기라도, 스러져갈 관계라도.)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손에 힘이 빠져 글씨는 알아보기 어려워지지만 할머니는 계속 편지를 쓴다. 네 사랑이 참 과분했노라고, 함께 있었던 시간이 즐거웠노라고. 집배원이 들어갈 수 없다는 곳으로, 어떤 편지도 배달되지 않는다는 곳으로.


살아 있는 한 사람은 계속 편지를 쓸 것이다. 배달되든지 배달되지 않든지 상관없이. 함께 있었던 날들의 온기를 간직하고서 자신 아닌 다른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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