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by 북남북녀

십오 년 만의 긴 휴가였다. 마스크 쓴 사람들로 거리는 넘쳤으나 아쿠아리움에 가고, 대공원에 가고, 시원한 물줄기 흐르는 계곡도 찾아가자고 우리는 설렜다. 휴가 첫날이 지나고 열이 오르며 집에서도 거리두기 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괜찮아, 열은 곧 떨어질 거야. 기다리는 동안 주변은 물로 넘쳐났다. 방안에 고립되어 있는 엄마가 그리워 찾아오는 아이를 밀어내고 혼내며 끊임없이 내리는 빗소리를 들었다.


주차장에 물이 차오른다고 차를 빼 달라는 방송이 모두 잠든 시간에 유령처럼 흘러나왔다. 주섬주섬 옷을 입고 캄캄한 현관으로 향했다. 물이 찰랑찰랑해, 종아리까지 올라왔어. 날아갔던 비둘기가 이파리를 물어오듯 남편은 문밖의 소식을 내게 들려줬다. 불도 켜지 않은 거실에 어정쩡하게 서서 차를 옮겨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는 중에도, 비가 땅바닥을 때리는 굉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땅이 움푹 패고 맨홀 뚜껑이 열리도록. 비는 그 기세를 꺾지 않았다. 부러진 나무와 기우뚱한 벽과 흘러넘치는 토사물과 둥둥 떠내려가는 자동차들. 구멍 뚫린 하늘의 포효가 세상을 흔들었다. 십오 년 만의 긴 휴가라도 계획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불만이 있을 수는 없다. 폭우는 불만보다 치명적인 흔적을 남겼다.


도로에 물이 빠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매미가 울고. 해가 나고 공기가 달라지고 사람들이 거리로 나서고. 길을 걷는 자신을 발견하고 웃네, 생각하다가 물속에 잠긴 것들을 잊어가고. 불쑥 나타난 보라색 꽃 한 송이 보며 난처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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