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피 마실래?

유리잔에 커피믹스를

by 북남북녀

집에 손님이 오면 엄마는 코피 마실래, 물었다.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내가 듣기에는 이상한 말이었다. 엄마, 코피? 아니 코피. 커피라고 엄마야 말했겠지만, 커피라는 기호식품에 대해 알지 못하고 그 단어를 처음 듣는 나로서는 자꾸 코피라고 들렸다. 초등학교 입학하고 청소년이 될 때까지 갈색 알갱이가 든 유리병과 하얗고 보드라운 프림이 든 통, 커피용 설탕은 우리 집 부엌 한편에 언제나 자리했다.


가장 맛있는 배합이 커피, 프림, 설탕 1:2:2라고 들었는데. 엄마가 타는 커피는 달달하고 부드러운 맛이 나는데 내가 타는 커피는 텁텁하고 쓴맛만 났다. 프림을 더 넣으면 느끼하고 먹고 싶지 않은 커피가 됐고, 설탕을 더 넣으면 커피가루와 프림과 조화되지 않는 맛없는 단맛만 느껴졌다. 시험 전 날 잠을 물리치기 위해 커피를 타면서 ‘커피를 어떻게 하면 맛있게 탈까’는 다음 날 시험 문제보다도 나를 더 고심하게 했다.


직장인이 되었을 무렵 고맙게도 이런 내 고민은 말끔히 해소됐다. 커피, 프림, 설탕이 담긴 유리병이 사라지고 최적의 배합을 찾아낸 커피믹스가 상자에 담겨 그 자리를 차지했다. 봉투 끝을 떼어내 내용물을 잔에 쏟고 뜨거운 물만 부으면 맛 좋은 커피가 완성됐다. 출근하자마자, 점심 식사 후에, 오후 잠이 쏟아질 때 커피는 몽롱한 의식을 깨우는 음료이자 최고의 간식이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직장동료들과 나누던 두서없는 이야기들, 일상의 작은 휴식 시간.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하면서는 새벽에 책 읽으려고,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 위해, 집안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끊어내고자 믹스커피 봉투를 뜯었다. 과용한다는 자각으로 하루 세잔 이상은 마시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들까지.


커피 문화가 바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출근하기 전 남편이 싱크대 서랍을 열고 커피믹스 한 주먹을 가방에 넣었다.

“직장에 커피 없어?”

“코로나로 이용자가 줄고 행사가 없어지면서 커피믹스를 안 사놓더라고. 요즘 사람들은 커피믹스 안 먹어. 스타벅스 같은 전문점 커피 먹지.”


이 말은 동생에게서도 듣던 말이다. 동생 역시 직장에서 점심시간이 끝나면 전문점에서 파는 커피 한 잔을 마셔야 비로소 커피 마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었다. 집을 방문 한 젊은 아기 엄마의 손에도 집 앞 커피 전문점에서 사 온 테이크아웃 컵이 들려 있었고. 투명 플라스틱 컵에 우유 섞인 차가운 커피를 마시면서 코피 마실래, 물으며 손님 앞에서 유리병 뚜껑을 열던 엄마가 떠올랐다.


커피 가루, 프림, 설탕을 배합해서 엄마는 커피를 탔고, 나는 스틱을 뜯고 내용물을 컵에 쏟아 커피를 만들었다. 요즘은 집에서 직접 원두를 내려마시거나 동네마다 흔히 있는 커피 전문점에서 취향에 맞는 커피를 주문할 수 있다.


상황은 변해가고 시간은 흘러가도 내 시간은 멈춘 곳이 있어서 부엌 싱크대 한 편에는 언제나 커피믹스가 놓여있다. 늘 먹어왔던 커피믹스를 여전히 즐겨 마신다. 최근 즐거움은 캔맥주를 구입하며 공짜로 얻은 작은 유리잔에 커피믹스를 타 먹는 것이다. 유리잔에 마시니 혀에 닿는 커피의 촉감이 부드럽고 더 깔끔한 맛이 나는 듯싶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서 새벽 독서를 하는지, 새벽 독서를 하려고 커피를 마시는지 알 수 없으나 둘 다 기분 좋은 것들인 것은 확실하다. 서늘해진 기운으로 두 손에 닿는 커피잔의 온도가 반가운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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