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의 경쾌한 술렁거림 속 나 혼자 눈물 흘리는 듯한 슬픔이 스미는 이유는 씻지 않은 그릇, 덩어리를 이룬 먼지, 넣어야 할 두툼한 옷, 밤새 계속되는 아이들의 기침 때문 일 수 있다. 높이 오르려는 욕구를 가진 이는 이러한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이야 거들떠도 보지 않겠지만
위로 오르려는 욕구가 단계를 필요로 한다면(부의 사다리처럼) 사소하고 하찮은 일상에 제동이 걸리면 단계가 필요 없다. 밑으로 쭉 떨어진다, 암흑이다. 이봐요 설거지 하나 안 했다고 밑으로 떨어진다니 과장이 심하지 않나요, 한다면 설거지 하나 쌓여 있다는 것은 간단한 손놀림으로 해결 가능한 것들을 수행할 에너지가 없거나 의지가 없다는 것이고 자잘한 일상의 흐트러짐을 회피하지 못하는 어느 날 팡 터지고 만다. 고함이든지 갈등이든지. 이런 상태로는 살 수가 없잖아! 도망갈 곳도 없다, 이불 속이라면 모를까
고결한 영혼들로 사랑의 등정을 시도하다(“사랑이 이해의 밝은 빛을 향해 등정하는 과정을 묘사”) 뭐가 묻은 침대 시트로 하강하는 마샤 누스바움의 사랑의 등정(감정의 격동 3) 긴 말들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위를 올려보느라 일상을 혐오해서는 안 된다, 는 것은 알아들었다. 온갖 지저분한 분비물을 뿜어내는 불완전한 인간들이(“삶이 정액과 배설물이라는 이중의 염료로 ‘천상의 것이 아닌 육체’의 피부 위에 쓰여진 텍스트”) 이 땅에서 살아가고 정치를 한다.
“살짝 뭐가 묻은 몰리 블룸의 시트에서(.... 깨끗한 시트 위에 그이가 흘린 정액 자국이 있군. 그걸 일부러 다림질하여 없애고 싶지는 않아. <율리시스>) 자유주의적 국제주의를 발견하는 것은 터무니없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 정의와 사랑을 획득하기 위한 현실의 불완전한 사람들의 투쟁보다 더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다.” <감정의 격동 3 사랑의 등정> 1292p
플라톤, 스피노자, 프루스트(명상적 등정)를 거쳐 아우구스티누스, 단테(기독교적 등정)를 조명하고, 에밀리 브론테, 말러(낭만주의적 등정)를 살펴보다 휘트먼(민주주의적 욕망)까지 들여다본다. 마샤 누스바움은 이 버전들은 사랑을 왜곡하는 과도함은 정화시키고 사랑의 에너지와 아름다움은 보존하나 일상적 삶을 거부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등정이라는 비유 자체가 우리가 살고 존재하는 것에는 저급함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함을 암시한다고. 저자는 조이스(일상적 삶의 변형)로 하강한다. 무질서한 일상,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혼란 속에 자신인 채로 맞닥뜨리는 곳
“이 모든 작품은 이처럼 각각의 작품이 구성하는 독자와 현실적 삶 속의 독자 사이에 넓은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저 위를 주목하도록 사람들을 몰고 가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가 여전히 우리임을 발견했을 때 분노와 혐오감을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감정의 격동 3 사랑의 등정>1244p
고결한 천상계와 지긋지긋한 지상계 사이에는 환상이 존재한다. 내가 여전히 나임을 발견했을 때 이 환상이, 의도된 ‘넓은 간극’이 사람을 압박한다. 알아야 하는 것은 환상 속 세상이 아니라, 손 닿지 못하는 환상을 바라보다 무기력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불을 걷어차고 팔을 걷어붙이며 먼지 덩어리를 해결하고 달그락대며 그릇을 씻는 일이다. 아픈 아이의 이마를 짚는 일이다. ‘여기 이 혼란 속에 정말로 우주 전체가 있다’고 말하듯이 여기 이 일상의 무질서 속에, 균열 속에, 흐트러짐 속에, 완벽하지 않음 속에 사랑이 놓이고 삶이 존재한다.
“일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환상의 폭압을 내동댕이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감정의 격동 3 사랑의 등정>1267p
“플라톤에서는 누구도 생리 기간을 갖고 있지 않다. 스피노자에게서는 누구도 배설하지 않는다. 프루스트에서는 누구도 자위하지 않는다(비록 어떤 의미에서는 또한 그렇다고 다른 어떤 것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단테는 이 순간들을 기록하지만 지옥에 남겨둔다. 캐시와 히스클리프는 일상적 삶으로부터 두 사람을 똑바로 들어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악마적 강렬함에 의해 린튼의 세계보다 우월함을 입증한다. 말러에게서 규칙적으로 진행되는 일상적인 사회적 활동은 죽거나 죽어가고 있다. 등정하는 예술가는 이 세계를 혐오하며 울부짖는 자신의 목소리에 열광해 창조적 영역-거기서 사랑은 일상적 삶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부주의로부터 정화된 채 존재한다-으로 올라간다. 휘트먼에게서 몸과 에로틱한 욕망은 복권되지만 또한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하기보다는 변형되며 이 세계에서의 정의의 거대한 행진의 일부가 된다.” 1242p <감정의 격동 3 사랑의 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