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800 로벅스 사줄 뻔했다
너라는 신비
이것처럼 그려줘. <창가의 토토>를 소리 책상 위에 둔다. 부엌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 여기. 소리가 식탁 위에 <창가의 토토>와 종이를 올려놓는다. 이 표지처럼 색도 칠해주면 안 돼? 알겠어, 얼른 종이를 가져간 소리는 역시 1분 내에 색을 칠해 식탁 위에 올려둔다. 흠 정성 좀 들여주지, 소리그림을 들여다보다가 내가 그리면 이보다 못 그릴 듯해 <창가의 토토>를 읽고 쓴 기록에 소리그림을 넣기로 한다.
소리의 세계는 신비롭다. 다른 말로 당황스럽다 해야 하나. 영유아 검진을 갔을 때 아이가 어떤 것을 붙들고 일어서나요, 의사가 묻는다. 아니요, 전혀요. 의뢰서를 써 줄 테니 큰 병원에 가보세요. 이날부터 책장이나 옷장을 붙들고 소리가 일어선다. 뭐 굳이 일어설 필요 있나 앉아 있어도 할 게 많은데, 자세였는데.
시골에 가면 어른들의 염려 섞인 시선을 받는다. 네 살까지 소리가 사용하는 단어는 엄마, 어부바, 하리보. 왜 말이 늦을까 고심하는 부모와 달리 뭐 굳이 말할 필요 있나 지금 상태로도 충분한데, 자세를 소리는 유지한다.
신생아였을 무렵 남편과 나는 응급실로, 주말에도 문 여는 병원으로 심장을 콩콩대며 뛰었다. 커다란 문제가 있을까 초조한 우리와 달리 심드렁한 표정의 의사는 아무 이상 없어요. 그런데 선생님 아기가 왜 이렇게 울지요, 울음을 그치질 않아요. 의사는 더 심드렁한 표정으로(조금은 한심하다는 듯이) 아기는 원래 울죠.
손이 종이에 베이거나(눈에 띄는 상처는 없으나) 가래가 있어도, 콧물만 흘러도 눈물도 줄줄 흘러내리는 아이를 보며 아, 소리는 신체의 낯선 감각이나 통증에 민감한 아이구나. 남편과 내가 응급실로 뛰어갔던 이유가 이거였군, 지금에서야 고개를 끄덕끄덕
리본 머리띠를 하고(내 생각에는 리본이 조금 큰 편인데) 삐친 단발머리로(드라이 싫어) 열한 살이 된 소리가 관심 있는 것은 로블록스 게임. 옷은 아무 데나 책가방 속은 너저분 씻는 것은 대충대충인(시간 걸리잖아, 귀찮아) 소리의 머릿속 95퍼센트는 게임일 듯싶다. 3퍼센트는 태권도, 나머지는 그 외 전부?
엄마! 소리가 학교에서 돌아와 힘차게 나를 부른다. 왜? 나 사회 시험 삼십 점 만점에 십육 점 맞았어. 뒤에서 이등이야. 1700 로벅스 사줘. 뭐라고? 뒤에서 이등이라고? 응, 9점 맞은 애도 있는데 걔가 뒤에서 일등이야. 뒤에서 이등이 자랑스러운 소리의 해맑은 표정과 목소리에 시험은 봤으니까 짜장면은 사줄게. 에이, 그럼 로벅스 800은?
싱그러운 소리의 웃음이 자랑스러운 나는 또 뭐지? 하마터면 800 로벅스 사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