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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남북녀 Dec 04. 2024

내 방식대로의 사랑

육아라는 이름의

죽음은 인간의 삶을 살고 있다  

헤겔


하루라고 해봤자 아이들 뒤치다꺼리와 매번 나오는 설거지, 집안의 먼지 제거 및 정리 정돈, 걸레질 정도다. 일하는 엄마라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집안 일과 아이 돌보기가 주 업무라 말할 수 있다. 직장인과 차이가 있다면 일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 같이 사는 가족들의 생활패턴에 따라 들쑥날쑥 왔다 갔다이다.

 

오늘 같은 경우는 새벽 두 시에 눈이 떠졌다. 누워 있어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책을 읽기로 했다. 쥘리아 크리스테바의 <사랑의 역사>를 도서관에서 대출했는데 목차를 읽어보니 흥미로웠다. 사랑이란 것을 어떻게 정리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씻은 후 식탁에 앉아 책에 몰두하고 있을 때 소리가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왔고 두피만 대충 말려 젖은 머리로 침대에 누워 아이를 재웠다. 소리가 잠든 후 식탁에 앉은 지 삼십 분쯤 흘렀을 때는 나도가 거실로 나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엄마, 이리로 와봐.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다. 소파에서 잠든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준 후 책이 있는 식탁으로 돌아온다.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 보니 네 시가 넘어가고 다섯 시에는 남편을 깨워야 한다. 책에 빠져들고 싶은 욕구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책을 읽겠다는 의지도 조용히 가라앉는 중이다. 휴, 한숨과 함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어제 아침의 일이 떠오른다.

 

며칠 동안 아이들이 코감기를 앓았다. 아침 설거지를 하다가 아이들에게 꿀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진다. 소리는 아침을 먹은 후에 소파에 앉아 귤을 먹고 있었고 나도는 소리 옆에서 장난감을 꺼내 놀고 있었다. 꿀이 든 숟가락 두 개를 가지고 소파 앞으로 갔다. 장난감으로 놀고 있던 나도는 얼른 먹은 후에 다시 놀이에 집중하는데 소리는 남은 귤 반 개를 손에 쥐고 곤란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엄마, 귤 다 먹고. 꿀 먹으면 귤이 맛없어지잖아. 엄마 지금 설거지하다가 온 거야, 얼른 먹어. 소리는 잠깐 고민한 후 서두르는 내 말에 어쩔 수 없이 꿀을 받아먹었다. 꿀을 먹은 후 귤이 맛없어졌는지 손에 든 귤을 식탁에 올리고 학교 갈 준비를 하겠다며 화장실로 들어간다. 귤 맛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설거지를 하다가 손을 씻은 후 꿀 한 숟가락을 먹은 후 소리가 남긴 귤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단맛은 나지 않고 신맛만 입안에 남는다.

 

꿀을 먹고 귤을 먹으면 맛없어진다는 것은 아이도 알만한 사실인데 나는 내가 해야만 하는 꿀 먹이기(내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에 온 정신을 쏟아 아이의 당연한 말은 고려하지 않았다. 아이가 원하지 않을 때 내 사랑을 베푼 후에 아이가 원할 때는 바쁘다고 외면한다. 오늘 새벽만 하더라도 소리는 엄마 손잡아 줘,라며 나를 끌어안았다. 어둠이 아직 무서운 아이에게는 캄캄한 밤에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법인데 나는 아이 옆에 있으면서도 가스레인지에 물 올려 뒀어. 엄마 머리 감아서 눕기가 힘들어라고 그 자리를 벗어날 생각만 했다. 나도의 이리 오라는 요청에도 대충 등을 쓰다듬으며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다른 생각이라야 책을 읽겠다는 어쩌면 내게는 쓸모없는 일일 수도 있는 것들

 

사랑에 대한 글을 읽기 위해서 사랑을 지나가고 있다니. 사랑은 내가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은 그 시간뿐만 아니라 언제든 서로를 향할 수 있는 건데. 귤을 먹고 꿀을 먹겠다는 소리의 표정이 기억에 남은 것은 그 일방성에 있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나는 내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냥 식탁에 숟가락을 올려두고 귤을 다 먹은 후에 꿀을 먹으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내가 좋은 시간에 너를 위한 행동이라는 이유로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꿀을 먹이는 행위. 육아는 이러한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아이라는 대상에게 희생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요구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좋은 시간에 네가 옷을 입어야 하고 내가 좋은 시간에 네가 씻어야 하고 내가 좋은 시간에 네가 놀아야 하고 내가 좋은 시간에 네가 잠을 자야 해. 대신 이렇게 내가 너를 위해 애쓰고 있으니 내가 쉬는 시간에 너는 결코 나를 방해하면 안 돼. 이런 것 정도는 너도 나를 이해해야 하지 않겠니, 아이에게 향하는 엄마의 화는 정당하다.

 

대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 걸까, 내가 허용한 시간이 아니라 하여 사랑을 귀찮아하고 있으니. 휴, 한숨은 나를 향하여 내쉬는 숨이다. 방해자는 네가 아니다. 방해자는 내 자신이요, 조잡스럽고 인색한(사랑을 알지 못하는) 내 자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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