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네
학교를 졸업하며 실습까지 마쳤으나 필요를 느끼지 않아 신청하지 않은 자격증이 있다(있었다.) 오래전 일이라 생각도 나지 않았는데 다른 일로 성적증명서를 뗐다가 보육실습 P(Pass)라고 적힌 것을 읽었다. 100시간이 넘는 실습에 보육학 수강
보육 사이트에 접속하니 연도별로 필요한 자격증 구비서류가 제시되어 있다. 졸업증명서, 성적증명서, 마약검사확인서, 실습확인서. 세 가지 서류는 문제가 없는데 실습확인서는 까다롭다. 학교에 전화문의하니 방문하여 실습기관을 확인하고 서류에 직인도 받으라고 한다.
가는 방법을 알아보니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반. 아이 등교 후 곧바로 출발해 10시 무렵 학교에 도착했다. 실습 담당 부서를 찾아가니 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하여 직원이 내준 의자에 앉아 기다린다. 조교 두 명과 사무직원 세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아담한 사무실. 책상을 등진 창으로 녹색 이파리가 보인다. 전화 문의 응대와 타자 소리, 에어컨 가동 소음이 들려올 뿐 월요일 오전의 사무실은 조용하다.
회색 양복바지에 푸른색 줄무늬 셔츠를 입은 남성 한 명이 들어오며 담당자라고 말해 의자에서 일어나 인사한다. 졸업 연도가 언제지요? 동계 실습이었나요? 남자는 내게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본다. 한동안 남자의 타자 치는 소리만 내 귓가에 들려온다. 출력한 종이를 내밀며 확인해 보라고 하여 성명, 실습기관명, 실습기간 등을 확인하고 돌려준다. 직인을 받으러 가야 하니 기다리라고 하여 나는 다시 낯선 장소에 식물처럼 놓여 있다.
땀이 번들거리고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들어오며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이게 정부양식인데 어떻게 고치라고 투덜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거친 소음을 내며 타자를 치던 남자가 서류를 출력하기 위해 일어서며 아 정말 여러 사람 피곤하게 하네, 짜증 나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한다. 다른 직원 네 명은 못 들은 척 컴퓨터 화면만 뚫어져라 쳐다본다. 어색한 침묵이 아담한 사무실 안을 가득 메운다. 남자는 출력한 서류를 내게 내밀며 다시 한번 확인하라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다시 확인하고 남자는 다시 직인을 받으러 문을 열고 나간다. 몇 분 후 사무실로 들어온 남자가 미소를 띠면서 내게 서류봉투가 필요하냐고 묻는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학교 직인이 찍혀 있는 서류를 받는다.
학교 벤치에 앉아 오래전 실습했던 기관에 전화를 건다. 용건을 말하니 오늘 중으로 방문가능하다고 하여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서울역에서 버스를 탔던 기억만 있을 뿐 기관명도 생각나지 않던 곳인데.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니 전혀 낯선 곳이다. 회색 벽으로 가득했던 골목이 아파트로 모두 채워졌다. 기억에 의존해서는 도저히 찾을 자신이 없어 지나가던 행인에게 물으니 흰 반바지를 입은 중년 여성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며 손으로 가리키며 알려준다. 큰길 쪽으로 가면 어린이집 정문이 나왔을 텐데 내가 내린 곳은 후문이었던 듯싶다. 중년 여성이 친절하게 아파트 안까지 나를 안내하여 어린이집 앞에 도착했다. 출입문은 잠겨 있었으나 유리문 안쪽으로 앞치마 입은 분이 나와 있어 무사히 원장실로 안내됐다. 전화로 미리 말한 사항이라 원장은 서류를 달라 하여 곧바로 직인을 찍어준다. 오 분도 채 되지 않아 나는 다시 밖으로 나온다. 집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하여 주변을 살피는데 어느 방향인지 알 수 없다. 오르막길 끝의 회색 주택가 속 어린이집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기관명만 같을 뿐.
오래전 기억을 끄집어보면 세 살 반 23명의 아이들을 나는 매일 만났다. 낮잠시간이 되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아이를 내 옆에 눕히고 반달 모양 눈썹을 손끝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방법은 언제나 효과가 있어 잠이 오지 않는다고 돌아다는 아이들이 금세 잠들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이 들면 주방으로 가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오후 간식을 준비했다. 잘게 잘린 당근이 들어가는 꼬마김밥을 만들기도 하고 김 주먹밥을 만들기도 하고.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익숙하지 않은 버스를 타고 역으로 향한다. 중요한 서류는 준비됐고 인터넷 신청만 남았다. 선생님 이 서류를 확인하시겠어요? 선생님 몇 년도에 실습하셨지요? 선생님........ 누구 엄마가 아니라 다른 호칭으로 불린 것은 오래전 일인데. 이런 서류를 준비하는 것도. 지하철을 타고 오며 멍하니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