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살 소리 여덟 살 나도
어이없는 부상이지만 나도와 장난치다가 소리의 발가락이 꺾였다. 소파 앞에 주저앉은 아이가 울음을 터트린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놓고 뭘, 싶으면서도 아이의 발목 부분과 발가락 부근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겉으로 보이는 이상이 없어 괜찮을 거라 진정시킨다. 어린 시절부터 눈물이 많은 아이라서 나는 소리의 울음에 어느 정도 면역이랄까, 무심함이랄까가 생긴 듯싶다. 울음의 원인만 지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으로의 전환도 빠르기에
나야 엄마니 울음을 받아 준다 해도 학교 가면 어떻게 하나 학교 입학 시점에는 고민이 되기도 했었는데 학교에서 소리는 눈물보다는 웃음을 보이는 아이다. 4학년쯤이었나, 클레이 공예를 하다가 글루건에 손가락을 데어 화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통증을 꾹 참고 집으로 와 울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더 어렸을 적에는 학교에서 집으로 오다 넘어졌는데 아무렇지 않게 절뚝이며 현관으로 걸어 들어와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울음의 경계는 친밀감이구나. 소리에게 밖은 울음을 보일 정도의 친밀감이 생성되지 않은 공간이다.
울음이 소리의 친밀감에 대한 정도를 보여준다면 나도는 집에 친척들이나 손님이 오면 화장실에서 나를 부른다. 바닥에는 옷들이 뒤집어진 채 놓여 있고 변기에 앉아 옷 입는 것을 도와달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면 안 되잖아.
손님(타인은)은 나도에게 벗은 몸을 보여줄 정도의 친밀감이 생성되지 않은 관계다.(가족끼리만 있을 때 나도는 화장실 문밖에 옷을 벗어두고 들어간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후에도 옷을 입지 않고 집 안을 돌아다닌다. 가족 구성원 누군가 입으라고 강요하기 전까지는)
나도의 친구 한 명이(모모라고 한다면)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일주일에 두세 번 집으로 놀러 왔다. 주말 제외하고 매일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학기 초부터 방학 전까지니 꽤 오랜 시간이다(아이들은 같은 반이니 오전부터 저녁 무렵까지 같이 있는 거였다.) 처음에 나도는 손님들이 올 때면 화장실 안에서 나를 부르듯 그 친구 앞에서 벗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한 달쯤 지나자 화장실 안에서 나를 부르지 않고 하의를 벗은 채로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옷을 바닥에 놓고 나오는 아이에게 옷 입어야지,라는 잔소리가 필요해졌다.
나도 같은 경우 모모와 만나는 시간이 늘어가자(개인적인 접촉시간이 늘어가자) 모모에게 가족과 같은 친밀감(벗은 몸을 보여도 부끄럽지 않은)이 생겨났다. 친밀감과 시간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때 소리가 내 앞에서만(집 안에서만) 울음을 터트리는 이유도 나도가 화장실에서 나를 부르는 이유도 내가 엄마라는 이유도 있겠으나 (엄마가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내가 오랜 시간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하나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나도가 모모와 접촉하며 가족 같은 친밀감을 쌓아 갔다면 두 아이의 놀이를 겉에서 지켜보는 소리에게 모모는 여전히 타인(밖의 사람)이었다. 친밀감의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은.
엄마, 동생이 두 명 같아. 타인에게 거절을 잘하지 못하는 소리의 행동을 살펴보니 학교에서 돌아온 후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지 못한다. 어린 남자아이들의 거친 놀이 속에 어정쩡하게 자리 잡는다. 그만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어린 동생들의 행동을 조용히 받아준다. 계속되는 아이들의 놀이에 나 역시 피로도가 높아졌을 때라 집 안에서 불편감을 나타내는 소리의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모모가 감기에 걸리며 자연스럽게 놀이의 끝이 도래했는데 한 주 후 다시 집안에서 놀기 원하는 아이들의 요청에 나는 단호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 이제 밖에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