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누가 죽은 줄 알았다. 높고 격렬하게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왜 그러는데?”
“엄마, 노란색 머리 인형 못 봤어? 그게 없어졌어. 흑흑”
내가 가위로 자르는 종이 인형으로 인형놀이를 했다면 아이는 스티커로 붙이는 인형 놀이를 한다. 이번에 새로 산 스티커 인형 중 노란 머리색 인형 하나가 없어졌다. 방금까지 책상 위에 있던.
“엄마는 못 봤지. 방금까지도 책상 위에 있던 인형이 어딜 가겠어 잘 찾아봐.”
“없어, 엄마. 다 찾았는데 없어. 앙”
이러고 십 분을 높고 격렬하게 울었다. 어쩌면 이십 분일지도.
나를 붙들고 울다가 방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동생이 토닥토닥 머리를 두드리자 동생의 손을 뿌리치며 울었다.
작은 스티커 인형 하나에 저리도 슬픈 영혼이라니.
어제는 놀이터에서 친구들이 집으로 뛰어가는 모습에 아이 혼자서 높고도 격렬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면 웃음이 많은 애예요, 이상한 애 아니에요. 애들이 다 그렇지요, 라는 눈빛을 보낼 준비를 하고.
놀이터 한가운데서 마스크를 내리고 콧구멍을 후비고 있을 때는, 다른 엄마들이 보면 어쩌지 심장이 조여 왔다. 왜 놀다가 갑자기 콧구멍을 후비는 걸까, 밖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누누이 말해왔는데.
아이와 집으로 들어온 후 다시 한번 설명한다.
“밖에서나 학교에서는 콧구멍을 후비면 안 돼, 진짜로.”
“간지러운데 어떻게.”
음..... 할 말이 없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다른 사람들이 네가 콧구멍 후비는 거 보면 다 싫어할걸”
네 살 난 둘째 아이랑 다닐 때는 벌레를 볼 때마다 발걸음을 멈춰야 한다. 콩벌레, 송충이, 애벌레, 거미, 개미, 지렁이에 한참을 앉아서 바라본다. 개미야! 거미야! 지렁이야!
신기하고도 대단한 것을 본 모양 소리 지른다. 덩달아 나도 어디? 어디? 살펴본다.
“살아가는 것이 굳어져 감이 아니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안쪽의 눈과 귀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정채봉 작가는 쓴다. 작은 솔방울 하나한테서 산의 이야기를 듣는 것,
검불 한 낱한테서 푸른 초원의 대화를 듣는 것, 모래알 한 알에서 집채만 한 바위의 천만년 내력을 듣는 것.
아이들의 안쪽의 눈과 귀는 언제나 열려 있다. 조그만 애벌레에 대한 경탄이 터져 나온다.
높고 격렬하게 웃고 높고 격렬하게 운다. 웃는 것과 우는 것이 마찬가지다.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인형과 좋아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을 실제 살고 있는 아이에게는.
좋아도 좋지 않은 척, 싫어도 싫지 않은 척. 울고 싶어도 괜찮은 척. 작은 벌레에 경탄이라니, 이 무슨 추태일 까는 내 세계다. 유년 시절에 경탄했던 것들은 혐오의 대상이 돼있거나 아무런 흥미도 일으키지 못한다. 남들이 가는 발걸음을 쫓기 위해 열심히 달음질하게 될 뿐이다. 남들의 시선에 ‘나’를 맞추기 위해 전전긍긍할 뿐이다.
남들이 하는 일은
나도 다 하고 살겠다며
다짐했던 날들이 있었다.
어느 밝은 시절을
스스로 등지고
걷지 않아도 될 걸음을
재촉하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
박준 <그늘>
어른의 시다. 어른의 시는 그늘이 진다.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정채봉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애욕의 성, 소유의 성을 쌓느라 굳어져 간다. 그 성에 자신까지 가둘 정도로.
그늘진 곳에 있지 않은 아이들은 세상 모든 것을 보고 경탄하는데 바쁘다. 좋아하는 세상을, 싫어하는 세상을 실제로 살아가기에 소란스럽기까지 하다.
그 마음을 소중히 대하고 싶다.
아이들이 조금만 성장해도 안쪽의 눈과 귀는 숨기는 법을 터득하여 닫히고 말 테니. 자기만의 성을 쌓기 바빠서 안쪽의 눈과 귀는 없는 듯이 살아가게 될 테니.
햇빛 아래서 반짝반짝 빛날 때, 보석처럼 귀하게 대하고 싶다. 보석보다 훨씬 귀한 것들을.
스티커 인형 하나가 없어져서 대성통곡하는 아이를 보며 나는 왜 웃음이 나는 걸까.
나를 붙들고 꺼이꺼이 통곡하는 아이를 보며 큭큭 웃고 말았다.
미안해, 미안해. 아이는 그런 나를 보고 바닥에 주저앉아 더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미안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