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
황정은<계속해보겠습니다>를 읽고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가 있었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 약을, 어머니 약을, 할머니 약을 지으러 다녔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아버지 밥을, 어머니 밥을, 할머니 밥을 지어냈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청소를 하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불도 펴서 잠자리를 만들었지.
아버지 잠자리, 어머니 잠자리, 할머니 잠자리를.
밤은 끝없이 돌아왔지. 이불은 무겁고 고사리 같은 손은 크지 않았는데.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가 길을 가면 사람들이 쑤군댔고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가 학교에 가면 물건이 날아왔지
타닥, 타닥. 얼굴에 부딪혀 떨어지는 것들, 몹쓸 것들
지나는 선생은 웃었어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를 보면.
무수한 비가 우수수수 떨어지는 웃음, 우수수수.
어느 날 훅하니 뭔가 들어왔지.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에게.
훅 하고. 그날부터 지독히 우울했어요. 아무것도 못 하도록.
애자, 애자. 사랑으로 가득하고 사랑으로 넘쳤던 애자.
남편, 금주가 부인인 애자와 두 딸(소라, 나나)을 놓고 공장 톱니바퀴에 말려들어갔을 때.
불속에 들어가 웃고 싶던 애자, 고통으로 넘치는 애자.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이 가득 해지는 애자의 세계
인생의 본질인 허망을 알아버린 애자, 허망만 알아버린 애자.
허망에 묻히는 애자, 허망에 잡히는 애자.
딸들도 잊어버리는 애자, 고통으로 가득 차는 애자.
밤길을 걸었지,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와.
차 한 대가 휑 지나갔지. 둘이 걷는 동안
낮 길을 걷고 싶어. 지겨워 밤길은.
캄캄한 건 지겨워. 이제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는 낮길은 걸을 수 없었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 많은 것이 우수수수 떨어져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를 부르는 곳으로는 절대 다시 가고 싶지 않았지.
훅 들어온 그것은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를 놔주지 않았지
인생은 본래 공허하다 속삭이면서 죽기를 바랐지, 애자처럼.
“왜 너희는 행복하니. 왜 너희만 행복해지려고 하니.”
잡아끄는 어둠, 잡아 끄는 밤길.
갈 길은 가야지, 계속 살기 위해서는.
해가 비치는 곳으로 계속 걸어야지.
해를 볼 수 없다 해도.
고사리 같은 손을 가진 아이는 머물렀지. 어둠이 되어서. 그곳에
“나는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모두 마찬가지일걸, 고통은.
돌고 돌아 머물렀다 지나는 것.
밤길이 옷자락 하나 붙잡아 돌아봤지.
친구였던 그를.
돌아오라 속삭이지만 이미 삶인걸, 어째.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죽으려 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고.”
구덩이를 파내고, 파내고, 파내서 묻히고 싶은 사람들.
구덩이에 함께 들어앉지 않는다고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 살았던 수녀 힐데가르트는 말하지.
두꺼비처럼 자기 고통의 구멍 속에 기어 들어가 비애에 잠기지 말라고.
자신의 상처 입은 영혼만 사랑하지 말라고.
이 땅이 푸른 싹을 내는 총체적 장관을 바라보라고.
슬픔 안에도 기쁨이 잠재해 있으며, 모든 기쁨 안에는 행복이 깃들어 있다고.
“계속해보겠습니다”
계속, 계속.
미세한 폭력이 감지되더라도
계속,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