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를 몰라서

힘차게 싸웠습니다

by 북남북녀

장대비가 쏴아아 쏟아졌다. 둥글고 하얀 테이블을 베란다 창가 쪽으로 두고 책을 읽을 때였다. 흠뻑 젖지 않으면서 시원스레 내리는 비를 이렇게나 가까이 볼 수 있다니 축복이네 했다. 베란다 난간에서 튀어 오른 가녀린 빗방울이 얼굴에 부드럽게 닿았다.

이런 순간이면 지나간 사랑이라도 그리워해야 할 거 같은데, 생각나는 것은 우산대가 부러진 사건이다.


남편은 나와 만나기 전 칠 년 동안 짝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칠 년 동안 고백도 안 하고 한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니, 대단해했는데. 실은 나 역시 남편을 만나기 전 짧은 짝사랑들로만 이어진 시간을 보냈다. 그뿐 아니라 남편은 삼 형제 중 셋째요 나는 네 자매 중 셋째다.

결혼하기 전 함께 도서관에 간 적이 있다. 남편 될 사람이 햄 볶음밥 도시락을 싸왔다. 본인이 한 것은 아니고 어머니께서 싸줬다고 말하며 네모난 도시락을 도서관 식당에서 꺼냈다.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손수 도시락을 싸준 것도 신기했는데(우리 집은 일찍부터 필요한 도시락은 본인이 준비했다.)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는 더 깜짝 놀랐다. 볶음밥에 줄줄이 햄이 통째로 들어가 있다. 햄이 통째로 들어간 볶음밥이라니. 자매만 넷인 우리 집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볶음밥이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여름, 우산을 받치고 길을 걸었다. 쏴아아 내리는 비로 코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세찬 비에 여기저기서 물방울이 다리 쪽으로 튀었다. 그런 날 굳이 만나 말다툼을 했다. 말다툼하는 도중 나는 우산을 바닥에 쿵 꽂았고 우산대는 똑 부러졌다. 남편은 허둥지둥 자신의 우산으로 나를 씌웠다. 아, 답답해. 내리는 비를 보며 생각했다.


그날처럼 쏴아아 비가 내린다. 이런 날 겉옷을 위로 들어 비를 피하면서 싱그럽게 뛰어가는 영화 속 커플도 있었는데('너에게 난 나에게 넌'이라는 기분 좋은 노래도 흘러나왔지) 우산대 부러진 사건이 생각나다니 뭔가 손해 같다.


짝사랑 전문가에 로맨스에 대해서는 손톱만큼도 모르던 둘이 만나 살고 있으니 오늘 같이 비 내리는 날이나 펄펄 함박눈이 쌓일 때면 추억할 첫사랑이 없다며 아쉬워한다. 남편은 다음 생에는 결혼을 하지 않고 꼭 여러 사람을 만나볼 거라며 각오를 다지기도 한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칠 년 동안 한 사람을 짝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퍽이나,라고 나는 생각한다.


신혼시절, 이마가 뜨끈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서 누워있었다. 자매 넷인 우리 집으로 말할 거 같으면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누군가는 아픈 걸 눈치챘다. 아프냐고 이마를 짚어보기도 하고 열이 난다 싶으면 약이 필요하냐 물어봐주기도 했다. 커다랗게 신경 쓰지는 않았으나 함께 있는 공간의 사람들은 아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행동했다. 평상시보다 집은 조용했고 아픈 사람에 대한 배려가 공기 중 가득했다.


주말 한 낮 내가 아무리 누워있어도 남편은 옆 방에서 컴퓨터로 게임하는데 열중했다. 타다닥, 타다닥 옆 방에서 들려오는 자판소리가 누운 방안에 가득 찼다. 머리가 더 어질어질했다. 나는 남편을 불렀다. 기분이 상해서(게임만 열중하는 남편에게) 말소리가 날카로웠다. “나, 열나. 약 좀 사다 줘.”

중도에 게임을 강제적으로 중단당해 기분 상한 남편의 대답. “왜 내가 너의 약을 사 와야 하는데?” 나는 아픈 몸을 번쩍 일으켰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주말 한 낮 힘차게 싸웠다. 분노로 몸은 더 뜨끈해졌고 남아 있던 기운은 모두 빠져나가 침대로 풀썩 쓰러졌다. 약 없이도 푹 잤다. 일어나니 열이 뚝 떨어졌다.


저녁밥상을 마주하며 앉아서 연애를 해본 사람이랑 결혼했어야 했는데 말했고 남편은 나도 마찬가지야 대답했다.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하늘의 별만큼이나 다른 점이 많지만 아무리 아프더라도 밥은 먹는 게 둘의 공통점이다.


시원하게 비 내리는 주말 한 낮, 떠오르는 기억이 이런 거라니. 역시나 뭔가 손해 같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새 들>을 읽고 있어 더 그렇다. 상실을 경험한 두 사람이 절실하게 사랑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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