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이 남긴 것

두 백수의 육아휴직 경험기

by 북남북녀


집을 팔아서 육아휴직을 했다. 2014년 2.6킬로그램으로 첫아이가 태어났다. 남편과 내가 결혼 한지 9년 만의 출산이었다. 우리는 처음이자 마지막 출산이라 여겨서 첫아이에게 모든 열정과 애정을 쏟아부었다.


​버킷리스트 첫 번째가 남편의 육아휴직이었다. 남들과 다른 게 있다면 엄마인 나는 직장을 그만둔 뒤라는 것, 그러니까 남편이 육아휴직을 한다면 우리는 두 백수가 아이 한 명 보는 상황이 된다. 운 좋게 작은 아파트 분양으로 시작한 신혼부부였던 우리는 집을 내놨다. 셋이 함께 보내는 시간을 위하여. 집은 6개월 만에 팔렸고(매달 나가는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집을 팔아 대출을 갚았다.) 남편과 나, 아기 셋이 하는 생활이 시작됐다.


숲이 가까우며 동네가 깨끗하고 공원이 많아 선택한 동네, 구축에서의 생활.

바람이 불면 창문이 덜컹거리고 여기저기서 끼익, 퉁,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오던 집

한겨울이면 세탁기가 얼고 창에 뽁뽁이를 붙여놨더니 결로로 줄줄 흐르는 물에서 암모니아 냄새가 나던 집. 여기저기 박혀있는 굵기와 길이가 다른 못을 쓰다듬을 수 있던 집.


아침밥을 먹은 후 남편이 아기띠로 아기를 안는다. 나는 기저귀 가방을 들고 셋은 외출을 한다. 어느 날은 동네 도서관을 가고, 어느 날은 공원으로 향한다. 아기의 낮잠 자는 시간을 고려해야 하기에 움직임의 폭이 넓지는 않다.


도서관의 유아실을 처음 가본 우리는 아이들을 위한 시설에 감탄했다. 기기만 하는 아기를 바닥에 둔 후 아기의 행동을 지켜본다. 도서관 창으로 부드럽게 들어오던 햇살.

초보 엄마, 아빠인 우리는 도서관 바닥을 기는 아기의 움직임에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한다.


유모차를 좋아하지 않던 아기의 취향으로 남편은 대체로 아기띠를 메고 다녔다. 앞보기로 아기를 안으면 돌도 안 된 아기는 도로와 사람, 보이는 많은 것들에 미소를 지었고 우리 역시 함께 미소를 지었다. 까딱까딱하면서 두 발을 흔들던 아기의 움직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아고, 예뻐라'라는 아기에 대한 관심에 초보 엄마, 아빠의 하루는 충만하게 흘러갔다.


언제인가는 낮잠을 거부하는 아기로 인해 오후만 되면 버스를 타러 나갔다. 졸린데 잠투정만 하며 못 자던 아기가 덜컹거리는 버스의 리듬에 삼분 이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보통 세 시간씩은 자던 아기였기에 그동안은 남편과 내 휴식시간이다. 인터넷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잠깐 혼자서 산책을 나가거나. 과자도 오도독오도독 씹어먹으면서 꿀 같은 충전시간을 보냈다. 아기가 잠을 깨면 다시 육아에 충실하기 위해서.


남편의 버킷 리스트에는 그림을 배우는 것이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남편은 오후에 그림을 배우러 다니고, 나는 주말이면 조조영화를 보러 다녔다. 남편과 아기와 내가 셋이서 보내는 시간은 흘러갔다. 여유롭고도 충만하게.


그러나 언제나 일요일은 아니었다. 언제나 햇살이 온화하게 비치지도 않았다. 비가 오듯, 바람이 불 듯 우리 셋의 생활에도 그런 날이 있었다.


신혼 때도 서로의 직장에 매여 퇴근 후에 봤던 사람들이 하루 종일 붙어 있으면서 사소한 말 한마디에 고성이 오갔다.

마이너스되는 생활비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했다.

십 평대 작은 집에서 한 겨울 관리비가 40만 원이 나왔다. 아기가 추위에 떠는 것은 볼 수 없어 사용한 난방의 결과였다.


아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의 충만함과 경제적인 쪼들림 속에서 균형을 잡아가며 육아휴직 기간을 보냈다. 일 년으로 계획되어있던 남편의 휴직은 직장의 부름으로 인해 10개월로 마쳤다. 그 기간 동안 아기는, 기기만 하던 아기에서 걷는 아기가 되었다. 첫 돌도 무사히 넘겼다.


아기 목욕시키기, 아기 재우기, 책 읽어 주기, 놀아주기, 밤 수유 하기는 모두 남편의 몫이었다. 놀이터에 가더라도 나는 가만히 앉아 아기가 아빠와 노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키즈 카페에 갈 때면 책 한 권을 가지고 가서 아빠와 아기가 노는 동안 책을 읽었다.

밤에 아기에게 분유 먹이는 것은 남편이 전적으로 담당해 잠도 편히 깊게 잤다.


이제 여덟 살이 된 첫째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의 물음에 항상 아빠라고 대답한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지금도 아빠와 노는 것을, 함께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아빠가 회사 안 나가는 주말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둘째가 태어났을 때 백일도 안된 아기와 다섯 살이던 첫째 아이를 놓고 반나절은 외출할 수 있었다. 일이 있을 때는 한나절도 외출이 가능했다. 육아 휴직의 경험으로 남편은 애 둘을 아내 없이(힘은 들었겠지만) 보는데 무리가 없었다.


첫째가 감기라도 들면 둘째는 아빠와 작은 방에서 나는 첫째와 안방에서 생활했다. 어느 날 밤에 자고 있는 중 남편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첫째 아이의 감기로 백일도 되기 전 감기를 경험하고 있는 둘째의 구토로 온 상의에 분유가 묻어 옷을 찾으러 온 거였다.

남편은 그 모든 육아의 수고를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낮에는 직장에 다니면서도.


10개월이라는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육아휴직의 경험으로 남편은 아기가 어떻다는 것을 알았고 그 모든 수고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말로 설명하지 않더라도.


육아 휴직의 가장 큰 효과라고 생각한다. 아빠가 엄마의 말로 육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육아를 경험한다는 것에서. 아빠와 아기의 관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에서. 엄마를 통한 관계가 아니라.


그 좋은 효과를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으나 남편과 나는 가끔 이야기한다. 왜 남들이 육아휴직을 하지 않는지 알겠다고.

육아 휴직으로 지급되는 돈 외에 한 달에 백만 원은 더 생활비가 들었고 육아 휴직 10개월 동안 천 단위의 금액이 마이너스가 되었다. 우리는 결혼반지도 팔고 책도 팔고 팔 수 있는 것들을 팔며 생활했다. 자발적, 강제적 미니멀 라이프였다.


벌지 않아서 마이너스고 쓰는 것은 또 써야 했기에 마이너스가 됐다. 남편과 나는 육아 휴직 비 명목으로 나라에서 매달 지급되는 돈이 있었기에 벌지 않는 것만 고려했다.


그러나 계획되지 않던 경조사나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생겼고 그럴 때마다 벌이가 없었던 우리는 곤란한 순간을 맞이해야 했다. 남들은 쉽게 예상할 수 있던 것들을 우리는 경험해서 알았다.


둘째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육아휴직을 하지 않았다. 셋에서 넷이 된 책임감이 막중했다.

이전 02화팬데믹 패닉과 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