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패닉과 육아
슬라보예 지젝 <팬데믹 패닉>을 읽고
끼익, 조심스럽게 방문이 열린다. 첫째가 눈을 비비며 나와 ‘엄마’ 부르더니 소파로 간다.
소파에 누운 첫째에게 이불을 가져다 덮어준다.
첫째는 새벽마다 엄마가 거실로 나간다는 것을 알아챘다.
자다 깨어 엄마를 찾아 거실로 나온다. 새벽 세 시든 지, 네시든지.
잠들었다고 방에 옮겨놓으면 또다시 깨서 다시 나오기에 첫째를 몇 시간 정도 소파서 재운다. 책을 읽는 시간 동안은.
따라 나와 소파서 자는 첫째와 곁에 없으면 울면서 깨는 둘째.
어느 날은 반복적으로 깨서 우는 둘째를 어르다 보니 책은 몇 장 읽지도 못한 채 환하게 날이 밝았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산다면 좋아하는 일은 마음껏 할 수 없다.
혼자 있는 시간은 사치다. 예전 직장 동료가 아기가 생기고 7년 동안 영화를 본 적이 없다고 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의아해했었는데 그 의아함이 이제 내 생활이다. 새벽시간조차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어느 엄마들은 아기를 안자마자 모성애가 분출한다는데, 나는 아니었다.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쪼글쪼글한 신생아를 안았을 때 드라마나 영화처럼 아 하는 본능적인 탄성이 나오지 않았다. ‘어떡하지’라는 곤란함에 더 가까웠다. ‘혼자’라는 자유롭고도 가벼운 생활과의 작별, 영원히.
(부부 관계는 대등한 관계니 혼자 하는 생활과 마찬가지다. 아기와 비교한다면)
육아는 임신 기간처럼 열 달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아니다. 끝을 셀 수 없는 기간 동안 엄마로 살아야 한다.
아기와 함께 해야 한다. 그 사실이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까무러치고 싶었다.
혼자라는 생활에 아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랑이 아니라 의지가 필요했다. 아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전류처럼 흐르는 사랑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도 살고 나도 살아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내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면 생존하지 못할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 어느새, 생각지도 못하게, 갑자기.
지젝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일어날 줄 알고 일이 벌어진 것인데도 크게 충격을 받는 이유를 그 일이 생기리라고 정말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감염병 학자들이 바이러스에 대해 경고했고 실제로 매우 정확하게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영화처럼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는 그런 일이 생기리라고는 믿지 않은 것이다.
아기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열 달을 뱃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엄마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 작은 존재의 생경스러움 앞에서.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피를 흘릴 만큼 흘린 후 엄마가 됐다. 애정은 그 후다. 시련 같은 세상을 맞이한 후 아기와 나는 깨달아갔다. 엄마라는 것을, 자식이라는 것을.(그것은 서서히 자리 잡아간다. 지금도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일시에, 한 번에 되지 않는다. 이런 새벽 시간의 침해와 서로에게 계속되는 침해를 경험하며 적당한 자리를 잡아간다. 지나고 보면 그렇다.) 방긋방긋 웃는 아기의 웃음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엄마가 된 지 몇 개월 뒤다.
<팬데믹 패닉>을 읽으며 엄마라는 이름을 받아들이기 위한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것은 이 ‘받아들임’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바이러스가 물러나고 일상이 돌아올 거라는 희망과 달리 바이러스의 위협은 여기에 머물러 있다고. 그리고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인류는 같은 배에 타고 있고 이번 파동이 운 좋게 물러가더라도 새롭고 더 위험한 형태로 재출현할 수 있다고.
한 달만, 두 달만이 아니었다. 일 년, 이년 조심하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 바이러스와 함께 해야 하는 시간이 지속적일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공상과학소설의 현실화가 이뤄졌다. 일상이라는 예전의 시간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작별해야 한다.
일상을 기다리고 있던 내게 그 일상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충격이다. 자유롭게 나다니던 시간들.
놀이터에서 무리 지어 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은 사라졌다. 마스크는 계속된다. 영원히
지젝은 바이러스는 곧 깨어날 악몽이 아니라고 이 바이러스 세계에서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삶의 방식을 재구축해야 한다고.
이것이 내게는 엄마라는 이름을 받아들이는 것만큼이나 힘들게 느껴졌다.
이 바이러스를 앞으로도 계속 생각해서 주의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알던 세상이 사라졌다는 것이.
잘 버티면 이제 곧 일상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으로 지냈는데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엄마가 되기 이전과 이후의 세상은 확연히 달랐다.
그것은 계속되는 삶이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코로나 바이러스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달랐다.
이것 역시 계속되는 삶일 수 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마스크를 쓰고 어느 정도의 고립을 자초하며 타인과 접촉을 덜 하고 지내는 것.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계속되는 현실일 수 있다.
바이러스의 위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그러니 오늘, 그리고 모든 서늘한 날들에
우리 쾌활하게 살아가야지
메리 올리버 <어둠이 짙어져 가는 날들에 쓴 시>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