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베란다 창과 부엌 베란다 창 사이에 식탁이 자리하고 있다. 폭이 좁은 4인 식탁에 폭이 좁고 작은 티 테이블을 붙여 책상으로 사용한다. 티 테이블 위에는 테이블의 반은 차지할 듯한 커다란 독서대가 언제나 놓여 있다. 국을 끓이면서, 밥을 안치면서, 설거지를 하다가 작은 틈이 생길 때면 독서대가 놓여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앉는다. 멍하니 있더라도 독서대 위에 펼쳐져 있는 책 속 글자는 항상 눈에 들어와 안도하는 심정이 된다.
하얀 선풍기는 베란다 창 부근 구석에 놓여 윙하니 돌아가고 둘째 아이는 낮잠이 들었다. 첫째 아이는 소파에 누워 핸드폰으로 영상을 보는 오후. 창과 창 사이의 테이블이 놓여있는 곳은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선들거리는 바람이 팔과 얼굴에 닿는다. 창문 밖은 해가 쨍쨍하다. 여름은 여름이구나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불 앞에 서기가 싫어 저녁은 간단하게 배달음식을 먹을까 생각한다. 시원한 음료에 바삭한 치킨을 생각하니 침이 꼴깍 넘어간다.
월요일부터 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에서 원격 수업을 진행하는 아이는 꿈을 꿨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일어났다. 새벽 네 시였다. 나는 3시에 일어났으니 한 시간쯤 책을 읽었다. 소파에 앉아 잠이 안 온다는 아이와 네 시 반부터 원격수업을 들었다. 새벽이라 만들기 수업부터 들어갔다. 그림 그리거나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새벽에 우산을 만들며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5시에 둘째가 깨고 6시에 시리얼과 토마토로 아침을 먹은 후 계속 수업을 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내가 다른 일을 하면 도와 달라 계속 부르기에, 아이 옆에 앉아 같이 수업을 듣는다. 잠깐이라도 다른 일을 하려고 일어나면 아이가 내 손을 꼭 잡고서 도와줘, 엄마 말한다. 아침 설거지도 미뤄두고 새벽부터 보기 시작한 수업은 오전 열 시 넘어 마쳤다. 나머지는 내가 할 일이다. 만들기부터 필기한 내용을 사진을 찍어 게시판에 올려야 한다. 다행히 화요일만 새벽에 일어나고 다음날부터는(일어나는 대로) 일곱 시부터 진행됐다. 이 시간 동안 나는 아이 옆에 앉아 교과서를 넘겨주거나 동영상을 정지시켜 주는 등 사소한 일을 도와주며 옆에 있는다. 첫째에게만 바싹 붙어 있으니 심술이 난 둘째가 첫째의 만들기 재료를 제 것이라고 달라며 울부짖었다. 첫째는 안 된다며 도망가고 둘째는 제 것이라 울부짖고 나는 둘째를 달래기도 혼내기도 하면서 땀이 삐질삐질 흘렀다.
아이들이 자는 동안 혼자 조용히 아침밥을 먹고 커피까지 마시는 남편이 부러워서 원격 수업을 시작하니 아침 산책을 못 가네, 했다. 남편이 커피 잔을 든 채로 어째라고 말하며 웃는다.
지금은 금요일 오후. 아이 학습결과물은 진즉에 제출했고 둘째의 낮잠으로 윙 하는 선풍기 소리만 들릴 정도로 집 안은 고요하다. 차가운 커피도 한 잔 타서 작은 테이블 앞에 앉았다. 창과 창 사이로 부는 바람에 주방 베란다 옅은 녹색 커튼이 살랑살랑 흔들린다. 바람은 내 이마까지 쓸어주며 지나간다. 살 것 같다. 오랜만에 휴식 같다. 어차피 지나갈 여름, 잘 견디는 수밖에. 가을에 자리를 내주기까지 길어야 두 달. 그때까지 잘 지내보자 여름아
이번 주 읽은 책으로는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에쿠니 가오리의 <한낮인데 어두운 방> 지금 읽고 있는 토니 모리슨의 <보이지 않는 잉크>
토니 모리슨의 <보이지 않는 잉크>는 무릎 꿇고 읽어야 할 것 같다. 경건하다. 진지하다. 토니 모리슨이 계속 말하는 것은 흑인, 인종.
에쿠니 가오리 <한낮인데 어두운 방>은 불륜에 대한 찬가. 주인공의 불륜을 진리에 눈 떴다고 말한다. 진리에 눈 떴다는 의미는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남편 중심으로) 남편 아닌 남자로 인해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생각하게 된다는.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
나 라면 남자로 인해 눈 뜨기보다는 스스로 (진리에) 눈 뜨고 싶다. 결말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저자의 읽은 책으로 네 번째다. 아니 에르노의 책은 읽을 때마다 나와는 맞지 않네, 하는데 <세월>을 읽으면서는 깜짝 놀랐다. '와!'라는 탄성이 나왔다.
개인이 사회와 맞물려 가는 것을 문장으로 나타내는 섬세함. 그 점이 탄성을 나오게 하고 그 점이 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개인의 문제는 지극히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상처 역시 받아들여 상처라고 생각했다. 무시한다면 지나갈 일이지만.
아니 에르노의 개인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은 집단(사회) 속에 섞여 있다. 개인의 상처와 실패는 집단(사회)에서 나온다. <한 여자>의 구절
“나는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을 성격의 개인적 특색으로 보지 않고 어머니의 개인사, 사회적 신분과 연결해 보려고 한다. 그러한 글쓰기 방식은 내 보기에 진실을 향해 다가서는 것이며,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을 통해 개인적 기억의 고독과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돕는 것이다.”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발견. 어머니의 폭력, 애정 과잉, 꾸지람의 배경은 사회다. 그렇게 어머니를 몰아가는.(개인은 사회에 흡수된다.) 여기서 나는 그럼에도 그렇게 행하는 개인이 있다고 생각하는 반면 저자는 사회로 더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저자 소개란에 <개인의 기억 속에서 집단의 기억을 복원하고, 개인성의 함정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노력>이라는 구절이 있다. 아직까지도 내 어떠함과 저자의 어떠함이 부딪치나 사람으로 말한다면 매력 있다. 부딪치면서도 계속 만나고 싶다. 두근두근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