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락, 바스락 햇살 품은 빨래를 건조대에서 걷는다. 잘 마른빨래는 쿠키 같은 단맛을 내뿜는다. 해가 듬뿍 담긴 냄새, 잘 마른 해 냄새. 해 아래서 잘 마른빨래는 온기가 있다. 온기를 접는 손이 부드러워진다. 나는 만들어내지 못할 자연을 품은 온기.
더위가 한풀 꺾였다. 실내 온도는 34도 또는 35도가 찍히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들거리는 바람이 잦게 불어온다. 아이들에게 오르내리던 땀띠도 근심이었는데, 바람 덕분인지 더 이상 땀띠가 오르지 않는다. 대신 모기가 극성이다. 가로등 켜진 놀이터에서 밤마다 뛰어노는 아이의 다리에 볼록하게 솟아오른 자욱이 서, 너 방.
아침에 일어났더니 베란다 창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비가 조금 내린 모양이다. 베란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아침 시간, 얼굴에 부딪치는 바람에 차가움이 서려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나 느껴지던 차가움.
무더위와 바람이 공존해 있구나, 무언지 모를 것에 대해 감사하고 싶은 순간. 아주 나쁘지도 아주 좋지도 않은 것들의 조합으로 시간이 흘러간다.
나에게 좋고, 나에게 나쁜 게 무슨 그리 큰일일까 생각한다. 때 되면 비가 내리고 때 되면 해가 높이 떠오르고. 곡물은 알맹이를 품고 과일은 익어가며 꽃은 색색으로 무장하고 커다란 얼굴을 내민다. 꽃이 기능상으로는 얼굴이 아니라 생식기관이라는 것이 농담 같다.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아름다운 생식기관. 자손을 널리 퍼뜨리는 기능을 갖고 있는. 생명은 아름답다는 것을, 생명을 퍼뜨리고 자라게 하는 일은 아름답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꽃의 시기는 다른 것들에 비해 빠르게 저물어가지만.
짧고 긴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함을 말해주는 듯하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지금 내 시간도 생명과 관련된 꽃의 아름다움에 속해 있다.
빠르게 저물어갈 시간 속에 퍼트리고 자라게 하는 생명.
매미가 운다. 풀벌레 소리 요란하다. 주황색의 능소화와 배롱나무의 진분홍 꽃이 바람에 흔들린다. 오전 해는 방긋 떠올라 노오랗게 땅 위를 비추고, 나뭇잎은 커다란 손바닥보다 커져 울창한 숲을 이룬다. 건조대에 걸린 빨래에서 맡아지는 마른 해의 냄새. 이런 것들 속에 내가 있다.
지금 읽는 책, <일곱 명의 여자> 저자는 리디 살베르. 에밀리 브론테, 주나 반스, 실비아 플라스, 콜레트, 마리나 츠베타예바, 버지니아 울프, 잉에보르크 바흐만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담았다. 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이 담겨 있다. 저자 자체가 이 작가들로 어두운 시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어 친밀한 사람을 소개하는 듯한 어투가 마음에 든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저자 리디 살베르가 정신과 의사라는 점과 콩쿠르상 수상 작가라는 것.
주나 반스의 <나이트 우드>와 콜레트의 <여명>을 꼭 읽고 싶게 만든 책.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 단편집을 읽어보고 싶어 도서관에 갔다. 하루키 책들 중 제목이 눈에 들어온 책. 신선했다. 단편들 중 <뾰족 구이의 성쇠>가 기억에 남는다. 과자 하나에 목숨 거는 까마귀들. 진지한 자세로 돕는 사람들. 좋은 기회를 박차고 나오는 주인공.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만들어 내 손으로 먹을 것이다. 까마귀 따위는 서로 쪼아대다 죽어버리면 그만이다.”
<조용히 다가오는 나의 죽음> 소 알로이시오 신부. 미국 위싱턴에서 태어난 사람이 서품 받은 후 한국의 부산으로 와서 신부가 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펼쳤으며 구제 사업으로 필리핀까지 진출한다.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이란 루게릭 병을 진단받아 루게릭 병의 고통을 십자가 고통에 비유하며 구제 사업을 계속 진행해간다. 고통의 아름다운 승화라고 생각했으나 일반인들로서는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길이다.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오! 마이 파파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짐.
<그레이브야드 북> 닐 게이먼. 피서 대신 손에 든 책. 사정상 묘지에서 유령들 손에 자라는 주인공.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삶은 죽음보다 더 힘든 것이며 사람은 유령보다 악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삶의 모험은 씩씩하게 헤쳐나가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반나절 책에 푹 파묻혀 다른 세상을 읽는 즐거움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