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 맛은 알아요?
연애에 대한 사소한 생각들
영수 씨는 적당한 키를 가지고 있다. 적당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으면서 옷을 입으면 맵시가 나는 정도라는 거다. 동굴 동굴 한 강아지상의 얼굴이 웃을 때면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쌍꺼풀이 짙은 호감형의 외모에 매너도 좋다. 커피 타기라든지 무거운 물건을 들어야 할 경우 영수 씨는 얼른 뛰어온다. 이런 건 남자가 해야죠, 말하며 강아지를 닮은 듯한 순한 눈빛을 건넨다.
갑자기 잡힌 회의 일정으로 열 잔의 커피가 필요한 날, 누군가는 탕비실로 들어가 열 개의 커피를 만들어내야 한다. 직장에서 간간이 발생하는 명령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행동해야 하는 애매한 상황. 영수 씨는 얼른 일어나 탕비실로 간다. 열 개의 커피를 순한 웃음과 함께 쟁반에 받치고 가지고 온다. 갑자기 잡힌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치고 모두들 기분 좋게 퇴근한다. 영수 씨는 부드러운 기름 같은 존재다.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여성이든지, 남성이든지 영수 씨를 칭찬하는 말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온다.
일하는 중 틈틈이 발생하는 무료한 시간. 나는 별생각 없이 연애보다 결혼이 좋은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연애 때는 싸우기도 하고 만나면 영화 보는 것외에 할 일이 없어 헤맸는데 결혼하니 바깥에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안정감이 있어 편안하다는 이야기.
내 말을 듣고 있던 영수 씨가 연애는 설렘이죠. 진짜 연애에는 상처가 없어요,라고 얘기한다. 그래요,라고 말하며 나는 놀란다. 진짜 연애는 상처를 주지 않는다니. 관계라는 것이 깊어질수록 원하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의존하게 되고 의존하는 만큼의 기대심리는 나날이 올라가서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해주지 않는 어느 순간 상처와 분노의 쓰나미에 휩쓸린 경험이 있었기에. 내게 연애는 폭풍이었다. 쌓였던 감정의 온갖 부산물이 한 사람을 향해 폭발하는 순간들. 내가 대체 무슨 말을 이 사람에게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고성을 멈추지 못하던 순간들.
영수 씨의 핸드폰이 계속 울린다. 영수 씨는 핸드폰을 받지 않고 끊기도 한다.
"왜 그래요?"
"잠적중이에요."
영수 씨는 상처주기 싫어서 헤어지자는 말은 절대 못 한다. 연락을 안 받으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못 알아듣네 라고 영수 씨가 혼잣말하듯 말한다. 나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영수 씨를 본다. 나 같은 사람이면 못 알아들어요. 안 받으니까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더 연락할 수도 있어요. 이번에는 영수 씨가 눈을 끔뻑끔뻑 하며 나를 본다.
소정 씨는 키가 크다. 크기만 할까, 늘씬하다.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는 웨이브 있는 갈색머리가 걸을 때면 탐스럽게 찰랑찰랑 흔들린다. 상큼한 레몬향, 때로는 화사한 장미향을 은은히 풍기면서 걸어가면 사람들은 한 번씩 더 소정 씨를 쳐다보게 된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든지, 하늘하늘 원피스를 입든지 소정 씨의 나긋나긋한 말투와 몸에 밴 반듯함은 충분한 호의를 상대방에게 이끌어낸다. 능력 또한 뛰어난 소정 씨는 직장동료들의 일의 순서가 조금만 틀려도 옆에서 조언을 건넨다. 똑똑한 데다 완벽하기까지 한 소정 씨. 그런 소정 씨가 내게 건넨 말들 중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맥주 맛은 알아요 라는 것과 연애는 설렘이 전부라는 것.
소정 씨는 결혼이 하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산다. 저는 언제 결혼해요, 힝 우는 소리를 내면서 결혼한 사람들이 부럽다는 말을 종종 한다.
“남자 친구 있잖아요.”
“이제 헤어질 거예요.”
“아니 왜요, 착하다면서.”
“착하면 뭐해요, 설레지 않는데. 설레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더라고요.”
“그럼 이제까지의 연애가 설레기까지만 만난 거예요?”
“당연하지 않아요?”
나는 내가 들어왔던 소리들(사랑은 활활 타는 순간이 아니라 타고 남은 재 같은 거래요, 같은 류의 이야기들을) 소정 씨에게 해줄까 생각하다가 소정 씨의 눈빛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그 눈빛에는 역시, 당신은 맥주 맛은 모르는군요 라는 문장이 큼직하게 써진 듯 보였다.
소정 씨는 대화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크게 했다.
언제 맥주나 먹으러 같이 가요.
우리는 시간을 내어 맥주를 마시러 갔다. 와인잔 같이 생긴 작고 동그란 유리잔에 과일주스 같은 노란색을 띠고 있는 호가든을 그날 처음 먹어봤다. 향긋함과 씁쓸한 맛이 입 안에서 동시에 느껴졌다. 소정 씨가 웃으며 말한다. 맥주 맛은 알겠어요? 나는 웃었다. 글쎄요,라고 대답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