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창인데 엄마, 기다란 커튼은 필요 없잖아라는 말에 다른 집들도 보니까 기다란 커튼 하던데라고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그건 긴 창이라 그런 거겠지, 우리는 작은 창이고. 나는 한 번 더 덧붙여 말했다. 엄마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며칠 후 부모님 방에는 베이지색이 우리 방에는 옅은 분홍색의 짧은 커튼이 걸렸다.
저 앞에는 불빛이 물결처럼 지나간다. 손바닥 정도의 길이로 건물 사이로 지나가는 지하철이 보인다. 소리까지 들리지는 않고 빛의 일렁임처럼 보이는 밤의 지하철. 화단 덮개로 만든 베란다 데크 위에 앉아서 지하철이며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을 보는 것은 잠들기 전 행하는 일과다. 십 분이든지, 이십 분이든지 잠깐 짬을 내어 붉게 빛나는 십자가와 캄캄함 속에 서 있는 나무와 앞 건물과 멀리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을 바라보는 일은.
어릴 적 봤던 만화영화에 주인공이 다락방인 듯한 공간에서 창을 내다보는 장면이 있었다. 창틀에 두 다리를 쭉 뻗고서 보는 파란 하늘과 날아다니는 새와 빽빽한 건물 사이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그 장면이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는 나도 창틀에 앉아 밖을 보고 싶다, 고 의식적으로 생각한 적은 없으나 창을 떠올릴 때면 그려지던 그림.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올 때 안방 베란다의 바깥으로 여는 창쪽에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화단이 있었다. 흙을 넣기 위해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패어 있었다. 원래 용도인 화단으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 같아 고민하다가 원목으로 덮개를 만드는 시공을 했다. 덮개 안은 창고로 사용할 수 있으면서 나 혼자 앉아서 다리 정도는 뻗을 수 있는 평상 같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처음 앉는 순간 생각난 것이 어릴 적 만화영화였다. 창틀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는 주인공, 그곳에서 보이던 파란 하늘과 바삐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프로이트는 꿈을 소망 충족이라고 말했는데 무의식적으로 어릴 적 본 창틀에 앉아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좇고 있었던 걸까, 생각했다. 꿈에서든지 현실에서든지 무의식에 남아있는 이미지가 나를 움직이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어릴 적의 만화 장면이 오래 남아 있던 이유는 그 장면이 어린 내게 빛을 건네서 일 수도 있다. 언젠가는 저런 곳에 저렇게 앉아있고 싶다는, 소망.(삶을 이어가게 하는 소망들) 그러한 생각을 의식하고 있든지 하지 않았든지.
삶은 소망 충족으로 흐른다, 무의식 역시도 그렇고. 이렇게 생각하면 삶이라는 게 꽤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모르지만, (의식하는 나는 불만이 나오는 상황이라도) 시간은 나도 모르게 내가 원하는 곳으로 흘러간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반창을 보면서 기다란 커튼을 해야겠다고 엄마가 말할 때가 언제였더라. 결혼 전 입시생이거나 직장에 다닐 때니 한 이십 년은 지났나 보다. 그 장면 역시 종종 떠오를 때가 있었다. 그 이후로 계속 커튼이 필요 없는 집이었다.
커튼을 해야겠어, 창이 보기 싫잖아라고 엄마가 말한다. 며칠 전 새로 이사한 엄마 집에 갔을 때다. 베란다 창은 전 주인이 붙인 듯한 스티커 자국으로 얼룩덜룩했다.
이번에는 긴 창이네 다행히도. 방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커튼을 주문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