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애하는 고양이 자매에게 _ 그리고 나의 고양이들
강아지 가족인 지인과 고양이 가족인 나는 종종 고양이와 개의 차이점을 서로 그렇구나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개과와 고양잇과와 사람과의 차이와 비슷한 점 등을 얘기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모른다. 그 집 강아지라고 쓰지만 큰 개가 이뻐서 사진첩에 담아두고 있다. 지인도 우리 고양이들이 이뻐서 올 때마다 하나씩 챙겨서 준다. 서로의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니까 일 얘기 하다가도 동물 얘기 나오면 삼천포로 가는 직행열차를 탄다.
그림을 전공한 지인은 산업과 디자인 측면에서 두 동물의 다른 면을 보고 있었다. 시중에 디자인 문구나 용품에 고양이 캐릭터가 많은 이유가 있음을 나름 근거를 들어 말했다. 고양이는 눈, 코, 입 모아지는 하중이 인간의 얼굴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인화가 쉽고 귀여운 아기의 얼굴이 떠오르기 때문에 상품의 판매 빈도도 강아지 캐릭터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제품이 더 많고 다양하다는 의견이다. 팩트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나도 모르게 설득이 된다.
책을 살 때도 작가의 고양이들이 같이 있거나 하면 나도 모르게 산다. 우리 고양이들과 살기 전부터 그랬는데 그때는 내가 고양이를 좋아하니까, 동물을 사랑하는 작가들의 모습이 좋아서라고 생각했지만 혹여 인간의 아기 모습이 겹쳐 보여서 일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출판물에 고양이가 곁들여지면 확실히 눈길을 끌기 좋다. 이거 뭐지 한번 더 뒤척한다. 점차 늘어나는 반려묘 가족들을 통계를 확인하면 강아지 위주의 한국에 일침을 가하고 싶다.
"이봐요, 고양이에게 잘하세요!"
50~60년대, 세계는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상처를 치유하느라 바빴다. 또한 보수, 산업, 권력, 빅브라더 미국의 등장, 이런 말로 표현하면 좋을 시기다. 그래서 20세기 초반 제국을 이어 온 권력은 대놓고 제국을 유지할 수 없지만 산업과 정치에서 이권을 유지하려 애썼다. 전쟁 이후 국민들은 블루 컬러 노동자, 화이트 컬러 노동자로 새로운 경제 시스템 아래 계급과 계층이 나뉘었다. 아마도 이런 구조가 아주아주 오래 가리라 상류층들은 믿었을 것이다. 68년 프랑스 대학생들이 노동자의 권리, 인간의 자유와 해방, 베트남 전쟁 반대, 대학 자율화를 외치며 대학 점거 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프랑스 전역, 독일,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 일본, 중국 등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이것이 20세기의 전환을 이룬 68 5월 혁명이다. "혁명을 할수록 사랑이 더 많아진다" 이런 멋진 문구들, 해방구의 두려움 없이 사랑하고 표현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구글창을 돌리면 쏟아진다.
68 혁명에는 영화와도 관련이 있다. 54년 선포한 프랑스의 누벨바그 '새로운 물결'이란 뜻의 영화 운동이었다. 프랑수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에릭 로메르, 마르크리트 뒤라스, 자크 드미, 조르즈 프랑주, 아녜스 바르다 등, 지금은 세상을 떠난 거장들의 젊은 영화를 청년들이 봤다. 20세기 위대한 감독들은 68 혁명 이후 세계가 디지털화되는 거대한 전환을 보고 세상을 떠났다.
나의 청년기에도 한창 트뤼포, 고다르, 로메르 등의 영화를 봤다. 인간의 표현의 영역이 드라마 서사에 갇혀 있지 않고 프레임 밖을 튀어나올 수도 있구나 감탄을 한 기억이 난다. 아녜스 바르다를 만났을 때는 이분은 영화감독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현대미술의 영역이라고 봐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경계를 무너뜨린 작품들, 그녀의 귀여운 얼굴과 그렇지 않은 작품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한국에서는 바르다의 죽음과 맞물려 유작들을 개봉했고, 이전의 작품과 같이 상영하였다. 아마 OTT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니 아녜스 V에 의한 제인 B, 방랑자,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 정도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68 혁명과 누벨바그, 아녜스 바르다를 얘기하는 것은 그녀의 예술을 말하는 틈 사이에 언뜻 보이는 생명체가 있기 때문이다. 바르다가 사랑하는 얼굴들 영화를 보러 이대의 모모를 갔다. 유쾌하고 감동적인 작업 여행을 따라가다 끝까지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고다르가 좀 미웠고 여러 가지 감정이 들고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마지막까지 여운이 가시지 않는 것은 영화 속 자택에서 얘기를 나눌 때 그녀를 너무 사랑하는 고양이 때문이었다. 고양이의 이름은 니니.
여든 넘은 바르다가 하염없이 니니를 만지면서 작품과 삶에 관해 얘기를 한다. 사랑스러운 고등어 태비 니니를 보고 바르다의 뱅 머리 스타일을 보다가 그녀의 이야기가 사랑이야기로 들리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얘기가 빠져들다가도 니니가 등장하면 니니를 보기 바빴다. 다른 다큐이자 유작인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서는 "고양이를 바라보는데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노년의 그녀에게 사랑은 고양이였지 않나 싶다.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과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를 보시면 바르다의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만날 수 있다. 누벨 바그의 대표 감독인 그녀가 어떻게 노년을 맞이하고 삶을 사랑했는지 그녀의 고양이와 함께 여정이 있어서 고양이 집사들에게는 더 매력적인 작품이다.
2018년 초, 짧은 부고 기사를 읽고 하루 종일 울었다. 판타지 소설 작가 어슐러 르 귄이 영면에 들었다. 29년 생인 그녀는 생의 모든 것을 다 겪었고 아쉬울 것 없이 맞이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의 30대는 그녀의 책과 계속 맞물려 있었기에 존경하는 마음이 깊었다. SF 작품들 바람의 열두 방향, 어둠의 왼손들, 헤인 시리즈들은 과학소설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 것이다. 나는 SF보다는 그녀의 판타지 소설의 영향을 더 받았다.
세계 3대 판타지 소설인 반지의 전쟁,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 연대기가 있다. 르 귄은 이 중에서 어스시 연대기를 썼다. 이 문장을 쓰면서 벌써 나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세 작품 모두 대단한 작품들이다. 이 중에서 가장 문장이 단순하면서도 쉽지만 문장 끝의 여운 때문에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작품은 어스시 시리즈이다.(개인의 취향이지만) 시골 마법사 새매의 성장 소설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새매의 성장은 죽음 가까이 이르러 완성된다. 그가 구했으나 결국 그를 구한 여성 테나와 소녀 테루. 길지만 밤을 새워 읽게 만드는 이 길고 긴 판타지의 서사는 이름만 나와도 심장이 두근두근 한다. 골짜기와 도시들의 묘사, 캐릭터의 다양한 인격, 잔혹함을 비껴가지 않는 끈질김, 우아하고 심플한 그녀의 문장. 상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다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나'의 정신세계를 비집고 들어온 또 다른 세계였다. 잊어버린 판타지 속으로 날아가고 싶은 날은 서울 마포의 작은 방에서 어스시 전집을 꺼내서 지도를 보고, 게드의 여행 어디쯤 쫓아가볼까 서성거린다.
작가 르 귄이 진짜 판타지 세계로 떠나고 1년 뒤, 19년 한국의 책방에 한 권의 에세이가 도착했다. 80대 노인이 된 르 귄이 전하는 늙음에 관한 위트 가득한 에세이와 고양이 파드의 에피소드가 담긴 책이었다. 그녀의 고양이 파드는 우리 루카처럼 화이트와 블랙의 턱시도 고양이이다. 르 귄은 책의 챕터가 끝나는 곳에 파드의 연대기 하나씩 넣어서 3개의 꼭지를 담아뒀다. 늙음에 관해 살짝 들여다보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늙은이에게 자꾸 젊으라고 미디어가 강요하냐고 화를 내는 르 귄을 만날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 먹는 대로 두었으면 한다. 나이 든 친척이나 친구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기를. 존재의 부정은 아무짝에도, 누구에게도, 어떤 소용에도 쓸모가 없다. ”
그리고 여러 e북 2천 원으로 구입할 수 있는 짧은 글, 파드의 묘생일기가 있다. 파드의 입장에서 자신의 묘생을 이야기한다. '나의 생애, 파드 씀.'으로 첫 장이 시작되는 이 글은 핸드폰으로 50페이지 정도 된다. 르 귄은 심플하면서도 속삭이듯 말하는 투의 문장으로 이렇게 파드의 속마음을 말한다.
'이 집, 내 보금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는 상당히 만족스럽다.'
파드의 말은 르 귄의 바람이었을 것이고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바르다의 고양이 니니를 보면서 같은 무늬의 나의 고양이 아띠를 생각했고, 르 귄의 고양이 파드를 보고 턱시도인 우리 루카를 생각했다. 고양이를 옆에 두고 글을 쓰고 일을 하는 감각의 두 분과 내가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옆에서 그저 나의 고양이들을 바라만 보고 싶은 마음과 종종 집을 나갔다 오는 파드를 보며 걱정하는 마음은 애들이 다칠까 맘 졸이는 나와 다르지 않다. 세상 모든 집사들의 마음은 다르지만 다 같이 돌보고 사랑하는 마음을 베이스이다. 그러면서도 고양이들의 주도성, 독립성을 끝도 없이 보장해주고 싶은 마음 역시.
고양이를 생각하는 세계 집사의 마음을 담은 르 귄의 시 한 편으로 두 사람의 선생님과 그녀의 고양이들, 나의 고양이들을 담아본다. 졸시라고 했으나 어쩜 이렇게 우리 애들을 담았을까 코끝 찡긋 웃음이 나고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세계 3대 판타지 작가가 이런 귀엽고 스스로도 졸시라고 붙인 시를 쓰게 만든 작은 생명체라고 쓰고 사랑이라 읽는다.
내 고양이를 위한 졸 시
_어슐러 르 귄
하얀 발바닥, 두 귀는 까맣지.
곁에 없으면 허전한 맘 들지.
우렁찬 골골 송, 부드러운 털
언제나 꼬리는 하늘 위로 척.
편안한 발걸음, 시선은 강렬하고.
어떠한 행사든 턱시도 입고 가고.
거칠한 발가락, 분홍 코 자랑하지.
앉아서 생각하는 널 보면 기분 좋지.
품종은 길냥이, 그 이름은 파드야.
너 없음 내 삶이 힘들어질 거야.
(2024년 7월 22일 일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양이만 바라보고 싶은 습도 95%의 나날)
독후감 쓴 브런치 같이 읽기
늙음으로 향하는 위트 있는 한걸음_어슐러 K. 르 귄의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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