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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삐삐 Jun 03. 2024

고양이 헤어볼,
너의 꿀렁임에 나는 벌렁거리고

친애하는 나의 고양이 자매에게.  부지런한 그루밍은 헤어볼을 부르고


나의 아버지는 약사이셨고 시골 동네 한의사 집안이다. 할아버지는 전쟁 이후 한의사 자격을 따지 못해 개업을 못한 한의사셨다. 그래도 약을 잘 쓴다는 소문이 나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 조부모댁에서 여러 날 묵으면, 할아버지가 각종 약재료를 직접 다듬고 말리고 달이는 모습을 졸졸 따라다니며 할부지 이거 뭐냐고 묻곤 했다. 어린 손녀가 귀여웠는지 알아듣지 못할 인삼의 효능, 귤껍질의 쓸모 등 세상의 약재들에 관해 말씀해 주셨다. 그러다 달큰한 감초 하나 입에 속 넣어주시고 웃는 얼굴이 기억에 깊이 남아있다.

아, 이야기가 샛길로. 이 말은 내가 나름 한약과 양악에 꽤나 익숙한 의료집안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뭐 하나 고양이들의 첫 구토를 지켜본 첫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고양이가 게으르면 나타나는 존재

아이들이 5~6개월 되고 제법 청소녀 티를 내면서 털이 단단해지고 많아져 자주 빗어주었다. 고양이 커뮤니티의 선배 집사들이 전한 헤어볼 경고 때문이었다. 고양이들은 까끌거리는 혓바닥으로 털을 핥아 자기 몸 단장을 한다. 고양이 알레르기의 요인 중 하나가 혓바닥이 훑고 간 자리의 침이고 개보다 고양이 알레르기가 더 많이 나타나는 이유이다. 

개와 다른 점은 고양이가 스스로 몸단장을 하기 때문에 목욕을 시키지 않아도 된다. 고양이는 대부분 물 공포증이 있는데, 사막에서 와서 그런가 싶기도 하다. 나는 목욕시키려다 활어회가 되어 파닥거리는 꼬맹이를 내려놓고 이러다 너도 죽고 나도 죽겠다 포기했다. 커뮤니티 카페에서 가끔 몇 년 동안 목욕을 시키지 않았는가 대결이 일어나기도 한다. 

고양이 털을 핥는 행위를 그루밍이라고 한다. 고양이들이 부지런히 그루밍을 한 날과 안 한 날의 차이가 심하다. 특히 루카는 까망 고양이 계열이라 건조한 겨울에 그루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비듬이 올라온다. 사람도 아니고 동물이 비듬이 있다는 걸 눈으로 보고 헛헛헛 웃었다. 비듬이 있는 털을 만지며 "어휴, 루카야 그루밍을 쫌 해, 고양이가 게으르면 되겠니?"

그루밍을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뭍은 다른 존재의 흔적을 지우고 자기의 냄새를 없애서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위생과 건강을 관리하기 위해서이다. 고양이빗으로 털 손질을 해주면 구르밍을 안 하는데 내가 손으로 쓰다듬어주면 좋아하다가도 갑자기 핥아댄다. 살짝 서운한 맘에 예이, 내 얼굴을 온몸에 부비부비 해버리기도 한다. '쳇, 다 지워봐라 지워지는가'라는 심술궂은 언니의 마음이다.

열심 그루밍 중인 루카, 쪼고미 시절부터 그루밍에 열중. 가끔 게으름을 부리면 바로 비듬 등장


집사가 되는 통과 의례, 헤어볼

보통 고양이들은 하루 18~20시간 이상 자고 밥 먹고 바깥구경과 놀이를 하고 나머지는 구르밍을 한다. 온몸을 꼼꼼히 미용에 힘쓰는 고양이들의 털은 고스란히 내장기관으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로 헤어볼이다. 사람포함 동물은 먹은 것을 다른 형태로 뭐로든 내놓는 것이 순리이다. 이 순리를 고양이라고 거스를 수는 없다. 털량의 포화시점에 다다르면 입으로 뱉어낸다. 격렬한 웨이브와 온몸을 울려서 내는 꿀렁꿀렁 음악과 함께.

처음 둘이 번갈아 가며 꿀렁거리며 토를 할 때 심장이 요동을 쳤다. 뱉어내는 꺼먼 털덩어리를 보고 헤어볼이구나 알았지만 안심이 안되어서 병원으로 안고 뛰었다. 선생님이 만약 털 덩어리가 나오지 않고 연속적으로 하루에 5~6번 이상 구토를 하면 어디가 안 좋은 것이니 그때 다시 오라며 안심하라 했다. 그 후 한 살 무렵 진정한 질병의 구토가 무엇인지 아띠가 보여줬는데, 그 차이를 목격하고 나니 헤어볼 구토는 그냥 다행이다 소리가 절로 난다.

십 년간 고양이의 일상을 돌보면서 여러 상황을 마주하는데, 고양이의 헤어볼 구토를 침착하게 처리하는 나 자신에게 진정한 집사가 되었구나 싶다. 지금은 어디선가 꿀렁꿀렁 소리가 났다 안 났다 하면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아띠와 루카 중 누구인지 찾아본다. 꿀렁이는 고양이 곁에 조용히 다가가(놀라면 이동하기 때문에) 그 주변의 물건을 엄청난 속도로 치운다. 본격 고양이가 자세를 취하면 휴지와 걸레를 손에 들고 대기한다. 대저택의 집사나 메이드처럼 한 손에 청소도구를 들고 아가씨가 토하기 좋게 주변을 정리고 공손히 지켜보는...

배부터 가슴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는 꿀렁거림 끝에 헤어볼이 나오면 묵묵히 치운다. 내가 준비가 된 상태에서 하는 헤어볼은 진심 괜찮고 안심이 된다. 헤어볼이니까. 아이들에게도 속 괜찮니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간식도 주기도 한다.


맑은 눈의 광묘들, 아가씨들

그렇지만 가끔씩 와, 너무하네 이런 순간들이 왜 없겠나. 막 빨아서 펼쳐놓은 이불과 고양이 방석 위에 뱉어놓을 때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깨끗한 이불, 침구는 사람보다 고양이가 더 좋아하는데 꼭 이런 자리에서 한 번씩 해주신다. 이것보다 더 곤란한 것은 쓰려고 보니 읽는 분께 세심하게 상상하지 말라는 주의사항을 전해야.. 새벽 2~3시 170~80cm의 고양이 캣타워에서 사료와 함께 뿜어낼 때는 나도 모르게아,!!!!!!!....3&*!#(!#)!_1ㅇnf2i 

그러나 나는 십 년 경력의 집사이다. 소리치지 않고 화내지 않고, 불을 켜고 주변 상황을 살핀다. 발바닥에 미끌 뭉근 밟히지만 개의치 않고 발끝으로 걸어가 휴지와 걸레를 들고 치운다. 그곳이 어디든. 그래서 나의 애플 키보드 위에 쏟아내지 않도록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키보드 받침대 안으로 집어넣어두고 책은 절대 책상 위에 오래 두지 않고 책꽂이에 꼽아둔다.

가끔 집안 대청소와 벽에 붙여놓은 선반 위 카펫, 책상 안쪽 구석, 틈새 청소를 할 때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헤어볼이 나오면 기겁한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하라고 제발!! 그리고 그걸 들고 가서 하소연을 한다. 

"아띠야, 루카야. 내가 너희들의 자연현상인 헤어볼을 탓하진 않아. 물론 반갑지도 않지만. 그래도 말이야, 구석진 곳 잘 안 보이는 곳에다 뱉어놓진 말아. 갑자기 말라붙은 얘들 만나면 내가 넘 놀란다고!!"

물론 아이들은 멀뚱 쳐다보며 헤어볼 냄새를 킁킁 맡는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고. 

맑은 눈의 광묘들, 우리 아가씨들...

돼지털로 만든 빗만 허락하는 까다로운 아띠. 이 빗을 들고 가면 이미 그릉그릉 골골송을 부르기 시작한다


헤어볼이어서 안심하는 십 년 차 집사

아는 한의사 선배와 독소 배출에 관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고대 치료에서는 독성을 내보내어 몸을 지켰는데 눈에 보이는 위생을 중요시하는 현대사회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아버지가 배가 아픈 환자들의 약을 지을 때도 항상 토하거나 대변을 봤는지 여부를 물었다. 아마도 상황 진행을 예측하면서 약의 강도와 성분의 조합을 계산했을 것이다. 구토와 배변은 동물이 자기 몸을 지키는 중요한 과정이고, 더 아프지 않도록 비워내는 행위이다. 

고양이들이 아무리 꿀렁거리며 내 한숨을 끌어올려도 치우면서 헤어볼인지 병증에 의한 구토인지를 확인한다. 십 년 차가 되니 헤어볼이 아닐 경우 구토의 위액 색깔과 같이 나온 물질, 구토의 연속 숫자, 구토 이후의 고양이의 행동을 관찰 후 병원에 갈지 판단할 정도가 되었다. 구토는 고양이 질병의 신호이기 때문에 배변과 함께 매 순간 살펴봐야 한다. 쭈그리고 앉아 구토와 화장실 안의 내용과 색깔을 감식하고 있는 모습이 동물 가족이 아니라면 내가 변태 형사나 탐정으로 보일지도.


고양이들! 헤어볼은 뭐 괜찮아. 이불 까짓 거 빨다 빨다 안되면 바꾸면 되고, 애플 키보드 마우스 다시 사면된다. 그렇지만, 아파서 하는 연속 구토가 아니길 매번 기도하는 언니의 마음 알지? 밤새 쉬지 않고 뱉어낸 거품과 초록색의 췌장염 구토의 기억. 울면서 빨리 해가 뜨기를, 병원이 열기를 기다리며 토하는 너를 지켜보던 날과 비교하면 괜찮아, 정말! 사는 동안 다시 심한 통증을 겪지 않고 건강한 헤어볼 구토만 하자. 

고양이 언니는 고양이 토에 섞인 헤어볼을 보며 안심하며 잘했다 쓰담쓰담하며 미소 짓는다.


(2024. 6. 3 일어나 고양이 털을 빗어주고 쓰다)



3호 부록. 루카의 그루밍 타임

#고양이 #고양이자매 #헤어볼 #고양이구토 #집상의일상 #아띠와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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