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의 본질 08화

기자와 가치관

직업으로 생각하는 일의 본질

by 피라

1998년 1월의 일이다. 영국 월트셔의 도살장에서 두 마리의 돼지가 탈출한다. 뉴스에 나올 일도 아니다. 빨리 잡아 다른 돼지들처럼 햄으로 만들기 위해 12명의 추격자들이 긴박하게 돼지를 쫓는다. 그런데 돼지를 잡을 수 없었다. 어쩌다보니 돼지탈출 사건이 뉴스로 보도된다. 며칠이 지나도 돼지를 잡을 수 없었다. 돼지 두 마리는 조금씩 유명해졌다. 매일매일 포위망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두 돼지 이야기는 매일매일 뉴스에 나왔고, 사람들은 점점 더 돼지들의 안부를 궁금하게 여겼다. 불후의 명화, '내일을 향해 쏴라'의 두 도망자 주인공인 '부치'와 '선댄스'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돼지탈출사건은 영국인들의 심금을 울렸다.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고, 국제적으로 유명해졌다. 돼지들은 8일이 지나도록 잡히지 않았다. 영국 내 주요 TV채널과 신문, 그리고 유럽, 미국, 일본에서 모여든 사진기자와 TV제작팀까지 150명이 넘는 취재진이 월트셔로 모였다. 급기야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밤잠을 설치며 돼지의 탈출을 응원하며 두 씩씩한 돼지들을 동정하고 걱정했다. 결국 돼지들은 잡혔다. 사람들은 이 특별한 두 마리의 돼지를 도살장으로 끌려가게 놔두면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다른 돼지들처럼 도살장에서 최후를 마치게 가만히 놔두면 폭동이라고 일어날 것 같았다. 한 신문사가 이 돼지들을 1만 5천 파운드(당시 환율로 약 3천만 원)를 주고 사들인 다음 그들을 평생 동안 편안하고 안전한 곳에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하고 기뻐했다. 봄이 되자 2인조 돼지 스타는 켄트에 있는 바젤 공원에 영원한 보금자리를 틀었다. 초가지붕이 있는 큰 우리, 뒹굴며 목욕할 수 있는 진흙 구덩이, 주둥이로 헤집을 흙더미가 있는 최신 설비를 갖춘 집에서 살게 되었다. 또 어울릴 수 있는 돼지 이웃들도 생겼다. 2003년에는 '탭워스 투의 전설(The Legend of the Tamworth Two)'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2004년에는 두 돼지의 동상이 만들어졌다.


기자는 팩트와 진실을 찾아 세상에 알리는 사람이다. 기자는 세상을 들여다보며 그 안의 가치를 발견하고 세상에 전하는 사람이다. 기사의 가치는 팩트와 진실이 기반이다. 팩트는 취재를 통해 찾을 수 있지만 진실을 찾기란 쉽지 않다. 팩트는 겉으로 드러난 것, 진실은 내면에 감춰진 것이다. 뇌물을 받은 것, 이를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한 것은 팩트다. 왜 뇌물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 왜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진실이다. 취재하고 인터뷰를 하고 자료를 모아도 진실은 풀기 힘든 수수께기처럼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진실과 팩트는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르다. 돼지 두 마리가 탈출한 것은 팩트의 영역이다. 전원주택을 마련해주고 죽을 때까지 숙식제공을 하며 건강을 돌볼 집사까지 둘 가치가 있을 정도로 탈출한 두 돼지가 특별한 돼지인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는 진실의 영역이다. 근거도 없이, 탈출한 돼지가 다른 돼지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팩트도 진실도 아니다. 팩트의 바탕은 사건 자체고, 진실의 바탕은 근거다. 많은 사람들이 탈출한 돼지를 매우 특별하게 여긴다고 해서 지구별에서 햇볕도 못보고 갇혀 지내다가 태어난지 6개월만에 매년 도축되는 10억 마리의 탈출하지 못한 다른 돼지들과 월트셔에서 탈출한 돼지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건(팩트)과 이야기(진실)가 있다. 그 중에 무엇을 어떻게 알릴 것인지의 선택은 기자의 가치관이 결정한다. 기자가 속한 회사의 지침을 어기고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일도, 진실을 덮고 왜곡하는 일도 기자의 가치관의 결과물이다. 돼지 탈출한 사건이 기사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것도, 재미있다고 여겨 기사로 쓰는 것도, 공장식 축사에서 잔인하게 다뤄지는 공장식 축사와 환경문제를 고발하기 이해 기사를 쓰는 것도 모두 기자의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가치관이란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지에 대한 생각의 체계다. 가치관은 선택의 상황에서 드러난다. 호수에 싫어하는 아버지와 좋아하는 친구가 빠졌을 때 누구를 구할 것인가? 삶의 유일한 목표인 유럽 여행을 가려고 3년 동안 모은 돈 전부를 반려견의 치료비로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대학원 진학을 할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 일단 최저임금이라도 주는 직장을 다닐 것인지 더 좋은 곳에 가기 위해 계속 취업준비를 할 것인가? 선택은 가치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채용 면접 때 “만약 잘못된 업무 지시를 받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도 선택과 이유를 통해 지원자의 가치관을 파악하려는 의도다. 일은 가치 실현의 과정이고, 일의 과정과 결과는 일하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의 수많은 취재대상들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로 결정되는 기자의 기사는 세상의 수많은 삶의 방식 중에서 무엇을 선택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우리의 삶과 비슷하다. 수많은 선택지 중에서 무엇이 내게 더 가치있는가를 잘 결정하기 위해서 좋은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좋은 기사도 좋은 삶도 가치관에서 비롯된다. 삶이란 좋은 가치관을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평생의 과정이다.


자라고 자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한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는 느티나무가 되고 싶은 꿈이 아무리 절실해도,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씨앗은 나무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좋은 가치관을 가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진실이라는 토양이 없으면 좋은 가치관은 자랄 수 없다. 글로 기사를 쓰든 행동으로 삶을 써내려가든 팩트는 발로 뛰고 노력하면 갖출 수 있지만, 진실을 갖추기는 어렵다. 진실이란 온갖 가치들이 충돌하는 정신없는 전장에서 피어난 한 송이 꽃같다. 그만큼 서로가 고개를 끄덕이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다. 우리의 진실은 당신에게도 없고, 나에게도 없고, 당신과 나 사이 중간 어딘가에 있다는 말처럼 진실을 찾는 일은 어렵다. 진실을 가려내기 위한 법정의 공방이 얼마나 지난하고 힘든 과정인지를 봐도 그렇다. 기자의 일도, 일상의 삶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진실을 찾는 일은 소송처럼 힘들다. 그래서일까? 진실은커녕 팩트체크도 하지 않는 기사들이 난무한다. 팩트체크는커녕 아예 대놓고 광고성기사를 유통시켜, 기사인지 광고인지 분간하기 힘든 기사들도 많다. 이해관계가 정글처럼 엮인 사회에서 진실을 안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다. 상대가 나를 사랑해서 다가오는지, 보험영업을 하기 위해 다가오는지 알아야 한다. 상대가 내게 다가온다는 사실은 팩트고, 다가오는 목적은 진실이다. 언론사가 광고성기사와 선정적 기사를 통해 광고수익과 기사클릭수를 높이려는 것은 언론사의 수익에 목적이 있다. 언론사를 유지하는 경영자의 고충도 있겠지만, 단기적 관점만 생각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 유능한 경영인이란 이번달의 매출보다 지속적인 성장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살아가는데 돈이 중요하지만 돈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면 기자도 언론사도 가치를 잃는다. 가치를 잃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 잊혀진다. 기업의 목적은 수익창출이 아니라, 가치창출어야 한다. 수익만 올리려는 기업은 자멸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은 성장한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내 안에 다양한 가치와 진실, 세상의 다양한 가치와 진실에 눈감고 돈을 우선 가치로 삼아 진로를 선택해서 살아간다면 범람하는 광고성기사같은 삶이 될지도 모른다. 한번 클릭하고 끝나는 삶, 클릭수를 올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삶에는 진실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관심은 진실을 향한다. 인간은 진실을 찾고, 진실에 감동하고, 진실 때문에 삶을 살아간다. 진실을 추구하는 마음이 기자정신이다. 진실을 바탕으로 가치있다고 믿는 것을 알리는 일을 하는 사람이 기자다. 기자정신이란 기자의 가치관이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나는 셔터를 눌렀다.”고 안야 니드링하우스는 말했다. 삶은 전쟁터에서 셔터를 누르는 일과 같다. 복잡하고 힘든 세상에서 나만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고민하고 분투하는 과정은 참혹한 전쟁터에서 세상에 전할 가치가 있는 것을 충혈된 눈으로 찾아내는 과정과 같기 때문이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가치, 더 의미있는 가치를 찾아내는 사람이 저널리스트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팩트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저널리즘이다. 우린 모두 저널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저널리스트처럼 일하고 저널리스트처럼 일상을 살아야 한다. 이유는 간명하다. 그래야 직업적 성취를 이루고 의미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추구의 가치는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진로를 만든다. 나만의 진로는 진실된 가치의 다른 이름이다. 사회적 진실과 자신만의 가치가 담긴 좋은 기사를 쓰고 사진을 찍는 일 기자만의 일은 아니다. 의미있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은 모든 이들의 일이다. 기자정신이 담긴 가치관으로 살아가면 사람들이 가치를 알아본다. 세상이 나의 가치를 알아본다는 말은 나의 가치가 직업으로 자리매김한다는 뜻이다. 진실 속에서 나만의 가치를 찾는 일은 자신만의 진로를 찾아가는 일이다. 삶의 성취를 이루고 싶으면 진실과 팩트라는 두 바퀴로 일이라는 수레를 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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