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 생각하는 일의 본질
샌프란시스코의 퍼시픽하이츠는 미국을 대표하는 부자 동네 중 한 곳이다. 2020년 6월 9일, 아기자기 예쁜 주택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퍼시픽하이츠를 산책하던 한 백인 커플이 있었다. 커플은 수상한 짓을 하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중년의 동양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부잣집 입구 옆 나지막한 검은 담벼락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하얀 분필로 낙서를 하고 있었다. 커플은 발걸음을 멈췄고, 흰색 셔츠, 운동화, 반바지 차림의 여자가 뭔가를 적고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기가 당신 집인가요?”
“왜 묻죠?”
“이 담벼락도 사유재산이니까요, 낙서하든 뭘 하든 당신 마음이지만, 여기에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안 돼요.”
여자는 미소를 보이며 예의를 갖추어 말했지만, 뒷짐 진 채 훈계하듯 말했다. 남자는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뜻인 ‘BLACK LIVES MATTER’이라는 글귀를 적고 있었다. 그도 따져 물었다.
“여기가 저의 집이면 아무 문제 없는 것이고, 여기가 저의 집인지 아닌지 당신들은 모르잖아요?”
가던 길이나 갈 것이지, 남의 일에 참견하는 커플의 행동에 기분 나쁜 듯 대답했지만, 여자는 바로 맞받아쳤다.
“여기가 당신 집이 아닌 걸 우린 알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묻고 있는 거예요.”
“아, 그래요? 당신들이 이 집에 살고 있군요. 그렇죠?”
“아뇨, 우리 집은 아니지만, 여기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아니까, 물어보는 거예요,”
그 동네를 훤히 아는 듯 단호한 여자의 말에 남자는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그러면 제가 제안을 하나 할게요. 여기 사는 사람한테 전화를 하든가, 경찰에게 신고하세요. 당신들이 나를 범죄자 취급하니까요.”
커플은 곧바로 낙서한 남자를 경찰에 신고했다. 곧 출동한 경찰은 순식간에 상황 파악을 끝낸 후 곧바로 돌아갔다. 분필을 쥐고 있던 그 남자는 집주인이었다. 그는 18년째 그 집에 살고 있는 제임스 후아닐로라는 이름의 필리핀 이민자였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상황은 종료되었지만, 진짜 사건은 오해가 풀린 뒤부터 시작되었다. 대화가 오고 갈 때 스마트폰으로 대화 영상을 서로 찍었는데, 집주인 후아닐로씨가 영상을 SNS에 올렸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동양인이 부자 동네에 살 리가 없다는 편견으로 집주인을 범죄자로 단정한 커플의 태도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영상은 전 세계에 빠른 속도로 퍼졌고, 순식간에 1,600만 명 넘는 사람들이 보았다. 커플의 신상도 털렸다. 그 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안다고 거짓말을 한 여자는 라페이스라는 화장품 회사의 CEO인 리사 알렉산더로 밝혀졌다. 쏟아지는 비난에 리사는 사과문을 내었지만, 거래처가 끊겨 회사가 위태로워지고, 남편은 해고될 정도로 파장은 걷잡을 수 없었다. 결국 회사 웹페이지도 닫았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을 범죄자 취급하고 과잉대응으로 살인까지 하는 미국 경찰의 인종차별적 태도를 비난하는 분위기와 맞물려 커플의 말과 행동은 백인 사회의 뿌리 깊은 일상적 인종차별 태도의 상징이 되었다. 겉으로 드러난 돌발적 사건 하나만으로 한 사람의 삶 전체를 판단하는 건 진실과 거리가 멀 수도 있겠지만, 퍼시픽하이츠 낙서 사건은 한 가지 분명한 교훈을 준다. 일상 속 단정적 생각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스스로 돌아봐야 한다는 교훈 말이다.
헬렌켈러와 설리반의 위대한 이야기는 백인 부자동네에서 낙서하는 아시아인을 바라보는 태도로부터 시작된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차이에 의해 파멸의 삶과 희망의 삶이 제각각 피어난다는 뜻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단정하는 태도와 단정하지 않는 태도의 차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상처받은 사자 새끼같은 헬렌켈러를 처음 본 설리반이 퍼시픽하이츠의 백인커플 같은 태도로 ‘넌 딱 보니 희망이 없어, 내가 너 같은 사람을 잘 알거든.’이라는 단정적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사람은 배움이 늘어나고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잣대로 사람을 단정하며 판단하는데 익숙해진다. 누구나 눈앞에 비친 겉모습, 세상의 경험과 상식이라는 잣대로 사람을 단정하기를 좋아하지만, 설리반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헬렌켈러의 절망적 모습을 보고도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것, 사회적 통념을 근거로 그녀를 가르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지 않았다. 몇몇 정보와 기준으로 대상을 쉽게 단정하는 습관은 에너지를 아껴 게으른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편리한 방법이기 하지만 때때로 큰 오류를 범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방식의 단정의 오류가 범람한다. 타인들이 나를 단정하고 나는 타인들을 단정한다. 타인이 나를 단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대하기도 한다. 타인들이 단정한 세상을 정보, 지식,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도 세상을 똑같은 방식으로 단정한다. 단정은 단정을 만나 증폭되어 편향적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단정의 결과물인 좋아하는 것 위주로만 추천하고 연결시키는 SNS도 확증편향적 삶에 기여를 한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단정의 철창에 갇혀 타인과 세상을 한 부분, 한 방향으로만 바라본다. 잘못된 단정의 태도는 나와 타인을 공격한다.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왜곡된 단정, 성급한 단정이 문제다. 성적, 대학, 취업, 성격, 외모, 신체 조건, 경제 문제, 가정 환경, 인간 관계와 같은 내가 처한 조건과 상황으로 자신의 삶 전체와 먼 미래까지 단정하는 태도는 편리하긴 하지만 낙서하는 아시아인을 대하는 퍼시픽하이츠의 커플같은 태도다. 나를 단정하는 태도는 일상을 갉어먹고 삶을 무너뜨린다.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교육을 받는다. 교육은 미래가치에 대한 투자다. 하지만 교육의 결과가 성적과 스펙 경쟁으로 줄세워진 사람들의 행렬이라면, 그런 교육을 통해 행렬의 앞에 서지 못한 사람들은 기회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하는 태도를 배운다면 모두의 미래는 암울하다. 육아의 궁극적 목적은 아이를 독립시키는 것이고, 교육의 현실적 목적은 직업을 갖는 것이다. 공부를 하는 이유는 조금이라도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고, 대학을 졸업하면 조금이라도 좋은 곳에 취업하길 원한다. 중고등학생들은 일단 대학이라는 목표, 대학생들은 일단 취업이라는 목표를 위해 공부하고 스펙을 쌓는다.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스펙을 쌓으면 장밋빛 미래가 보장될거라고 믿는 태도는 담벼락에 낙서하는 사람을 단정하는 태도와 같다. 낙서하던 사람이 집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듯, 그렇게 입사하길 원하는 기업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다른 현실과 만나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익이 나올 곳에만 투자한다. 기업 입장에서 채용은 사람에 투자다. 기업은 일을 잘할 것 같은 사람, 즉 직무역량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채용한다. 일할 때 발휘되는 실질적 직무역량은 스펙과 같은 지원자의 조건과 직접적 인과관계가 없다. 업무수행 과정에서 요구되는 실질적 직무역량의 실체는 지원자의 지식, 학력, 성적, 경험과 같이 측정가능한 스펙이 아니라, 의사소통과 문제해결을 위한 객관적 상황분석능력, 자기주도성, 가치기반 책임감, 공감기반의 협업능력, 피드백을 통한 자기개선능력 등과 같은 전인적 태도다. 기업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 직무역량을 갖춘 인재를 뽑기 위해 오늘도 고심한다. 탁월한 스펙을 쌓은 좋은 대학 출신이 일을 못해서 힘들어 하다 퇴직하고 자기 일을 시작했지만 계속 고전하기만 하고, 학창시절에는 인정받지 못한 친구가 큰 사회적 성취를 이루는 사례는 많다. 대학입학과 취업은 본격적 삶의 시작일뿐이다. 삶의 여정에서 자신만의 진로를 찾아 행복하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상황과 조건에 대해 단정하는 태도부터 버려야 한다. 경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해도 안되고, 경쟁에서 뒤쳐졌다고 좌절해서도 안된다. 둘 다 똑같이 나쁜 단정의 태도다. 우리 삶의 승패를 가르는 본질적 역량은 따로 있다. 본질적 역량의 싹은 누구에게나 있다. 씨앗을 찾지도 뿌려보지도 않는 단정적 태도로 좌절해서는 안된다.
누구나 인간답게 잘 살고 싶다. 인간다움은 자유를 추구한다. 자유란 삶의 선택지가 많다는 뜻이다. 공부를 하고 진로를 고민하고, 장래의 직업을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서다. 좋은 삶이란 선택지가 많은 삶이다. 돈을 추구하는 이유는 돈이 많을수록 선택지가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돈이 많아도 선택지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다니고, 좋은 기업을 다녀도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선택지를 늘리기 위해 분투하지만, 그 분투로 인해 선택지가 점점 줄어드는 삶은 점점 답답해진다. 아무리 좋은 조건에 몸이 자유로워도 정신이 자유롭지 못하면 삶은 감옥이 된다. 아무리 풍족하게 여러 곳을 여행해도 마음이 지옥인 여행자가 있고, 배낭 속 굳은 식빵을 씹으며 하루 10시간씩 걸어다녀도 행복한 여행자가 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정신은 방황하지 않는다. 자유롭지 않은 정신이 방황한다. 마음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수많은 단정의 그물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뜻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단정의 태도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정신이 자유로운 사람은 타인을 단정하지 않는다. 타인을 단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도 단정하지 않는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동일할 수밖에 없다. 간디가 동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그 나라의 도덕성을 알 수 있다고 한 이유는 동물을 대하는 태도로 인간들도 똑같이 대하기 때문이다. 이중적 태도는 일시적일뿐 결국 같아진다.
타인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되고, 삶을 대하는 태도는 진로를 대하는 태도, 직업을 대하는 태도, 일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 업무를 못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자신이 맡은 일을 단정하는 사람이다. 일이란 문제해결의 과정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상황을 다양한 관점, 다양한 가치로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단정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일을 한 가지 익숙한 관점으로밖에 보지 못한다. 단정적 태도를 가진 사람이 업무 성과를 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단정적 태도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준다는 뜻이다. 자신의 삶을 단정하지 않는 태도는 가능성과 변화를 이끌어 자신만의 진로와 직업을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도록 만든다.
나의 진로와 직업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의 직업을 이해하는 눈이 있어야 한다. 성적으로 줄세우기를 하듯, 차별과 편견의 시선으로 다양한 직업들을 바라보면 직업의 본질을 놓친다. 직업의 본질을 놓치면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을 가능성도 적고,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직업을 가지게 되어도 자신에게 의미가 없을 가능성이 높다. 직업을 바라볼때도 단정적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 청소노동자, 택배노동자와 같이 낮은 임금에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을 하찮게 보거나,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태도도 직업의 의미를 폄훼한다면 그런 태도는 자신이 어떤 직업을 가져도 스스로를 향하는 태도로 돌아올 것이다. 직업적 조건과 직업을 동일시하는 사람은 일을 통한 가치와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직업적 조건 안에 매몰되어 일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런 태도는 성별, 종교, 민족, 외모, 취향, 재력 등으로 사람을 단정하는 편견과 차별적 태도와 같다. 편견과 차별적 시선으로 단정하는 태도는 일상의 삶은 물론 일의 세계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단정적 태도는 문제해결에 가장 큰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자신의 직업을 통해 성취하는 삶을 살을 살아내려면 아무것도 단정하지 않는 설리반의 모습으로 자신을 대해야 한다. 어떤 직업도 어떤 일도 고정적이지 않다. 고정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직업을 바라보는 단정적인 시선일뿐이다. 단정적 시선에서는 어떤 진로로 만들어질 수 없다. 설사 만들어지더라도 그건 자신의 진로가 아니라 남의 진로다.
퍼시픽하이츠에서 산택을 하던 백인 커플이 담벼락에 낙서하는 아시아인에게 살며시 다가가, “글씨를 참 예쁘게 잘 쓰네요....”라며 열린 호기심으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면 커플의 삶도, 집주인의 삶도 달라졌을 것이다. 하마터면 오해할 뻔 했던 마음을 돌아보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게 되어 고맙다며 따뜻한 악수를 하고 헤어지고, 그 뒤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친한 이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진짜로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담론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태도들이다. 진로를 찾고, 직업을 가지고, 일을 통해 가치를 찾고 실현해 행복한 삶으로의 변화를 이끄는 것은 일상의 태도들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를 가벼이 여기면 안된다. 태도는 인간 그 자체다. 기업의 채용과 업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이 바로 태도다. 일을 대하는 태도는 직업을 대하는 태도와 같고, 직업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자신의 삶을 대하는 태도는 타인의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 자신의 기회와 선택지를 늘려 자유롭고 행복한 삶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단정적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아무것도 단정해서는 안된다. 죽음 앞에서 마지막 숨을 들이쉴 때 단정해도 늦지 않다. 죽을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삶을 단정하지 않아도 된다. 남은 사람들이 죽은 이를 기억하며 지겨울 정도도 단정할테니까. 살아 있는 자는 삶을 단정하면 안된다. 성적 때문에, 진로 때문에, 취업 때문에, 일 때문에 아무리 삶이 힘들어도 단정하면 안된다. 단정하는 순간 좌절, 분노, 무기력, 절망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 것이다. 삶의 목적은 단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