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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by 피라



2006년, 멧돼지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멧돼지가 불쌍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개항 때만 해도 한반도는 야생 동물의 천국이었다. 야생동물의 종류와 개체수도 많았지만, 특히 한국에 서식하는 동물은 더 아름다워서 열강들의 사냥터였다고 한다. 호랑이와 표범 의 털빛과 패턴이 특히 아름다워 서로 차지하려고 세계의 사냥꾼들이 한반도에 몰려왔다는 자료도 있었다. 일본은 호랑이를 사냥하는 군대인 정호군까지 만들어 한국의 동물들을 사냥했고,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의 동물들은 점점 사라졌다. 전쟁 물자가 필요해 가정에서 키우던 개까지 마구잡이로 데려가 털과 가죽으로 이용했다 한다. 기록과 기억에 의하면 그렇게 한 해에 수집된 개 가죽이 40만장을 웃돌았다 한다. 그 당시 한국의 개들은 풀어 키웠고, 일본인들의 개들은 묶어 키웠는데, 한국인들도 개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묶어두는 습관이 생겼다 한다.(낮에는 사람들이 일터로 가서 집에는 개만 있는데, 이때 눈에 보이는 개는 모조리 데리고 갔다 한다. 특히 털이 풍성한 삽살개가 인기가 있었다 한다. 영화에서 보면 귀까지 덮는 모자로 이용된 듯 하다.)



민간의 동물이든, 야생의 동물이든 그렇게 엄혹한 시간을 보냈고, 해방 이후에는 호랑이도, 표범도, 곰도, 여우도, 늑대도, 사슴도, 산양도, 토끼도......거의 모든 동물들이 거의 멸종되고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또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산으로 가고(그때 무엇을 먹었을까? 야생 동물들이 타켓이었으리라 ),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수십년 동안 쥐잡기 운동을 하느라 독살 살포를 했고, 그때는 사람 주거지 주변에 나타나던 여우, 토끼같은 동물들도 함께 몰살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한국에는 야생동물들이 대부분 멸종했다. 여우도, 늑대도, 호랑이도, 표범도 없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끈질기게 살아남은 대형 포유류가 멧돼지다.



멧돼지의 잘못은 두 가지다. 그 길고 긴 잔인한 세월 동안 살아남은 야생동물이라는 점과 개체수가 많다는 점(물론 인간의 관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잘못이 하나 있다. 못생겼다는 점, 호감가는 외모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 있다. 멧돼지는 뉴스에 보도되는 것과 달리 정말 온순한 동물이다. 겁많고 순한 동물이라 사람의 인기척만 나면 도망가버리는 동물이다.(그래서 멸종하지 않고 살아 남았다.) 하지만 딱 두 가지 경우에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무척 공격적으로 변한다. 자신이 위협당한다고 생각할때(공격을 당해 상처를 입었을 때)와 새끼가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다. 그때는 상대가 누구든 물불 가리지 않고 무조건 돌진이다. 저돌적이라는 단어가 유래한 이유다.



멧돼지는 한반도에서 사람 못지 않게 힘든 세월을 견디고 살아난 야생동물들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외모로 오해 받는 대표적인 동물, 극단적 두 성향 때문에 유해조수의 상징인 동물, 하지만 알고 보면 생각할 것들이 많은 동물이었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갔고, 멧돼지에 대한 책을 내려고 자료를 모으고, 포수, 정책담당자, 농부, 아이들, 멧돼지 출몰지역, 멧돼지 보호구역(양양) 등을 방문하고 관찰하고 인터뷰하며 매달렸다. 학계와도 연락했고, 다른 나라의 사례와 전문가를 만나기 위해 일본도 보름 가까이 다녀왔고, 한국어와 영어로 된 멧돼지에 대한 모든 자료는 다 수집했다. 이런 활동들이 알음알음 알려져 한국에서 멧돼지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로 잘못 알려져 한 티비 프로그램(주주클럽으로 기억)에서 인터뷰도 한 기억이 난다. 그렇게 공을 들였는데, 정작 멧돼지 책은 내지 못했다. 출판사와 출판계약까지 했지만,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책이었다. 무척 어려웠다. 진지하고 무거운 주제를 경쾌하고 재미있게 다루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그때 알았다. 아이들 대상으로 하는 책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내 능력의 한계를 처절하게 확인하고 결국 책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지금도 컴퓨터 저장장치에는 그때의 자료, 원고들이 가득하다. 멧돼지들아, 미안하다.



지금도 간혹 멧돼지 책을 모니터링 한다. 그때는 멧돼지에 관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는데, 지금은 멧돼지의 입장에서 환경 문제를 다룬 책들이 간혹 보인다. 그럼에도 멧돼지는 외모와 이미지 때문에 좋은 소재는 아니다. 보이는 것, 인식하는 것과 진실은 언제나 다르다. 그런 점에서 멧돼지는 지금도 여전히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다. 멧돼지에 대한 인식이 바뀐다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내린 차별과 편견으로 인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리라 믿는다. 난 이미 늙고 지쳤으니 그런 일을 누군가 대신해 주면 좋겠다. 이 땅의 차별 받는 존재들을 위해. '동물을 대하는 태도로 그 사회의 도덕성을 알 수 있다'는 간디의 식상한 말을 굳이 또 꺼내지 않아도 된다. 외모 때문에, 학벌 때문에, 스펙 때문에, 부모의 경제적 능력 때문에, 그 외의 온갖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꿈을 생각해 보지도, 꺼내어 펼쳐 실패할 기회조차도 얻지 못하는 아이들, 청년들도 멧돼지의 삶, 숨죽이며 살아가는 이 땅의 야생동물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우리 사회가 좀 더 정의로워졌으면 좋겠다. 내가 아는 정의로움의 시작은 약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멧돼지는 강자가 아니다. 약자다. 생긴 것과 행동이 때때로 점 그러할 뿐이다. 때때로 저돌적으로 변한다고 강자가 아니다. 룰을 정하는 사람이 강자다. 강자는 약자를 생각해야 한다. 그게 휴머니즘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세상은 지속가능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멧돼지(동물)가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멧돼지(동물)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다른 야생동물도 그렇듯, 인간도 그렇듯, 멧돼지도 짝짓기를 위해서 멀리 이동한다. 개마 고원의 멧돼지가 전라도 지역까지 이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서식지에서 구할 수 없게 된 물과 먹을 것을 위해 멀리 이동한다.인간도 경제활동을 위해 이동한다. 전 국토가 도로 등으로 동물 서식지가 독방 감옥처럼 갇혀 버렸지만 목숨 걸고 생존을 위해 이동한다. 고시원에서 나은 미래를 위해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물이든 인간이든 숨 쉬는 존재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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