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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by 피라

넷플릭스 영화를 보다가 일시 정지를 한 장면 만큼이나 생생한 어릴 적 장면이 여러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1978년, 초등학교 1학년 시절의 한 장면이다. 60여명의 아이들이 콩나물처럼 교실에 앉아 있고, 칠판 옆 풍금 앞에 앉은 선생님이 아이들을 차례대로 호명한다. 이름이 아니라 번호를 부른다. 불린 아이는 풍금 옆, 칠반 앞에 선다. 선생님의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음악 실기 시험이다. 그때 나의 번호를 아직 기억한다. 번호는 키가 큰 순서였다. "5번!"이라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탁 옆으로 걸어 나갔다. 그렇게 많은 사람을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경험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떨렸다. 불러야 할 노래는 모짜르트 곡에 가사를 붙인 '작은 별'이었다. 모든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대 공포증이라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였다. 반주가 시작되었고, 선생님이 귀찮은 듯, 피곤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을 주었다. 노래를 시작하라는 신호다. 어린 나는 최선을 다해서 노래를 시작했다. "반 짝, 반 짝...."이라고 딱 4음절을 소리를 내자마자 선생님은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리는 듯한 눈빛을 담아 짧고 근엄하게 "다음!"이라는 말로 내 노래를 끊어버렸다. 그 말은 교실의 정지된 공기와 한 어린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나는 부끄러움, 배제와 무시 당한 느낌, 모멸감을 느끼며 내 자리로 걸어 들어와 앉았다. 그때가 태어나 처음으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평가'를 받은 경험이다. 나중에 통신표를 받았을 때, 음악은 <양>이라고 적혀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그 강렬한 경험 이후로 나는 스스로 음악을 못하는 아이, 노래를 못 부르는 아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그건 내 의지라기보다는 사회적 의지였다. 어린 아이에게 선생님은 권위였다. 그것도 난생 처음 간 학교라는 공간에서 앞으로 내 인생에서 도움이 될 것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신성한 존재는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권위였다. 그때는 교사의 권위가 큰 시대였다. 음악 실기 시험은 공포스러웠다. 음악이 싫었다. 음악 시간은 언제나 떼창을 했고, 때가 되면 언제나 초등학교 1학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한 명씩 실기 시험을 쳤다. 학교에서 다음이라는 말은 심장을 쿵쿵거리게 만드는 마법의 단어였다. 축소, 무시, 전가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그와 비슷한 상황을 대하는 태도를 배워 나갔다. 학교는 잘하는 것은 더욱 잘하게 하고, 못하는 것은 재미있게 가르쳐주는 곳이라고 어른들은 말했지만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내게 노래 부르는 방법을 가르쳐 준 선생님은 없었다.


고 2시절, 깡소주와 새우깡을 사들고 친구 3명과 낙동강 하구언에 앉아 검은 강물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노래를 돌아가며 불렀다. 그때 노래 부름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내가 노래를 못한다는 사실보다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내 노래를 들려준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가치와 의미를 스스로 깨달으면 인간은 아무리 두려운 것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는 걸 술 마시며 배웠다. 무엇보다 친구들은 내 노래를 존중했다. 노래 부르는 것의 즐거움을 처음 알려준 그때의 친구들은 아직도 연락하며 가끔 만난다.


군대 시절, 성악과를 다니는 후임병에게 장난치듯 "야! 노래 부르는 것 좀 가르쳐줘!"라고 말했을 때, 15분 정도 배운 것이 초중고 12년 음악 시간을 통해 배운 것보다 더 많다. 그때 후임병은 대변 볼 때 힘을 주는 원리로 발성법을 재미있고 진지하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몇 년에 한 번 어쩌다 노래방을 가면 그 친구가 가르쳐준 발성법을 이용한다.


대부분 그렇듯, 학교의 음악은 싫어했지만, 일상의 음악은 나도 좋아한다. 군 시절, 듣고 싶은 음악을 듣지 못한다는 상황이 힘들었던 것, 지금은 멈췄지만, 40살에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게 너무나 좋았던 것, 평생 몸치였는데, 2년전부터 음악을 들으면 몸이 저절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는 사실 등을 종합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음악이란 과목에 대해 그 정도 평가를 받은 것은 좀 혹독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편으론 그때 나는 당연히 '가'를 받았어야 했는데, 아이의 음악적 관심의 싹을 자르지 않기 위해 평가자의 양심을 거스르며 '양'이라는 양호한 점수를 준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 인간된 도리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긴 한다.


평가의 시대다. 한 끼 식사를 먹어도, 택시를 타도 평가를 한다. 사람을 평가하고 물건을 평가한다. 쇼핑에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타인들의 평가다. 세상을 만드는 것은 법과 제도가 아니라 후기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재생산되는 평가라는 데이터일지 모른다. 평가는 여론,취향, 가치, 의미, 희망, 좌절로 연결되고 확장된다. 사업과 교육을 구동하는 엔진도 평가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성적으로 평가 받고, 취준생들은 면접에서 평가 받는다. 조직에 몸을 담으면 성과로 평가 받는다. 옆집 아저씨, 앞집 아줌마도 나를 평가하고 나도 그들을 평가한다. 우린 평가로 의사소통하며 평가로 삶을 직조한다. 어떤 평가는 꼭 필요하고, 적절하며,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어떤 평가는 불필요하고, 평가를 위한 평가며, 평가로 인해 삶이 흐려지기도 한다. 심지어 목숨을 끊기도 한다.


오로지 한 줄로 세우기 위한 평가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은 것 같다. 평가를 위해서는 단순, 명확, 객관적 기준이 있어야 하고, 현실을 모두 반영하는 기준이란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평가는 언제나 어렵다. 평가가 쉽게 느껴진다면 평가를 잘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권위 있는 어떤 평가툴도 완성형이 아니라, 문제를 수정해 나가는 테스트일뿐이다. 결함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평가란, 자신이 신이라고 떠벌리는 사는 인간과 비슷하다. 평가의 목적은 더 나은 미래다. 하지만 인간이 행하는 어떤 평가도 대상의 모든 측면과 과거, 현재, 미래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다. 그래서 평가하는 사람은 평가를 통해 배우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평가 받는 사람은 평가에 삶을 의탁하지 말아야 한다.


공부와 시험은 불가분의 관계다. 교육에서의 평가 문제를 처음부터 생각하면 좋겠다. 방법론이 아니라, 존재론에 대해 고민하면 좋겠다. 어떻게 평가를 할 것인가의 문제보다, 평가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면 좋겠다.


1978년 가을의 어느 날, 한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의 진실은 모른다. 음치인 아이가 계속 노래를 부르게 놔두면 아이들의 조롱감이 될까봐 배려하는 차원에서 "다음"이라고 잘라버렸는지, 미션을 수행 못하면 다음 단계로 진행되지 않는 게임의 차가운 알고리즘같은 평가였는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선생님의 후기(평가) 그 이후로 어떤 후속 조치(교육)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는 부족한 것을 배우기 위해 학교에 갔고, 아이는 그것을 배우지 못했다. 학교는 평가 받기 위해 가는 곳이 아니다. 잘한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가는 곳도 아니다. 학교는 부족한 것을 배우기 위해 가는 곳이다. 학생의 부족한 것을 찾아 가르쳐주는 활동이 교육이다. 학교 건물에 엄청나게 크게 멸공, 방첩이라고 적혀 있던 그 시절에 비하면 요즘 초등학교는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중고등학교 이후의 과정은 그 시절의 평가보다 더 엄혹해진 것 것 같다.


학생들에게 "넌 안돼!"라는 무기력을 심어주는 평가가 아니라, "넌 이걸 좀 배워보는 것이 어때?"라고 말하는 평가가 되면 좋겠다.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확인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부족함을 발견하고 간극을 줄이는 재미를 알게 해주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42년 전, 속도감있게 아이의 상태를 분류해 알려주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고 여겼던 선생님처럼, 인적성 검사, 직무적성 검사 결과를 제공하고 직업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하고, 입시 준비를 시키듯 진로로드맵을 짜주는 것이 진로 교육의 전부라 생각하지 않는 교사들이 점점 늘어 났으면 좋겠다. 박치, 음치인 아이도 조수미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할 수 있고, 음악의 역사를 공부하며 음악 칼럼을 쓰고, 음악 평론을 하고, 음악 잡지도 만들고, 악기도 만들고, 음악 공연 기획 등 음악과 관련된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주면 좋겠다. 평가에 따른 적성이 맞지 않더라도 직업으로 이어질 그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시작은 <이유>다. 음악 수업을 통해 음악을 싫어하는 아이들이 음악을 사랑할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도와주면 좋겠다. 음악 수업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수업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입시와 취업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수렴된 평가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하나의 대상에 담긴 수많은 측면의 지적 감수성을 일깨워주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그런 감수성들이야말로 취업과 창업 후 일을 통해 성취하는 창조적 행위들을 만들어내는 자산이니까. 그런 종류의 역량이 일할 때 필요한 진짜 스펙이다. 길잃는 사하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 그토록 처절하게 찾아 헤매는 돈으로 연결되는 역량이다. 다른 말로 사업적 능력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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