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이로

by 피라

그날 저녁 그는,

떠나온 이야기를 했어.


여행도 삶처럼 방향과 시간의 문제라고.

방황에 방황을 거듭하다가,

삶의 방향을 찾을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다 결심하고 떠나왔다고.


그렇게 홀로 2년의 여행을 마치고,

7일 전에 이곳 슐탄게스트하우스에 왔고.

내일은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날이라고.

29살 조엘, 이곳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룸메이트.

시장초입이 보이는 낡은 테라스가 있는 6인실 도미토리에서 그를 만났어.

6개월로 계획한 첫 배낭여행을 카이로에서 시작하는 초보여행자는 조엘이 무척 부러웠어.

2년 동안 홀로 세계를 떠돌 수 있는 강인함, 자유, 용기도 부러웠고,

그런 대단한 일을 끝내고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도 부러웠지.

밤 10시가 넘어 여행자는 조엘과 둘이서 테라스로 나왔어.

자신 또한 삶의 길을 찾기 위해 떠나온 탓인지 조엘과 좀 더 이야기하고 싶었어.

테라스 아래는 오렌지 불빛 사이로 아랍인들이 시장 초입 길에서 도란도란 얘기 중이었어.

“그래, 떠나올 때 찾으려 한 것은 찾았어?


응.

뭔데?


농부,


돌아가면 농부가 될 거야!"

조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업은 농부라고 말했어.

돈만 벌길 원하는 농부 말고, 자급자족만을 위한 농부가 되고 싶다 했어.

소박하게 농사짓고, 남은 시간은 산책하고, 책을 보고, 사색을 하고, 글을 쓰며 느긋하게 살거라 했어.

가난할지라도 행복한 삶을.

여행자는 되물었어.

멋진 삶이긴 한데, 그런 삶은, 나이가 많이 들면, 은퇴 후가 좋지 않아?

젊을 때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을 해보고 말이야.

젊을 땐 자신에게 많은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어?


조엘이 갸웃거리며 대답했어.

글쎄, 지금 하고 싶은 걸 왜 나중으로 미뤄야 할까?

그것도 삶의 끝자락으로.


여행을 하면서, 슬픈 일을 많이 보았어.

미루고 미루다가 너무 늦어버려 슬픈 일이 많았어.

이제는 뭐든 미루고 싶지 않아.

마지막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아껴두는 것도 좋겠지만,

가장 좋은 것을 지금 꺼내보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지금 가장 좋은 것이 나중에도 가장 좋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말이야.

지금 하고 싶은 일을 지금 하는 것,

그게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라 생각해.


여행자는 더 이상 물을 말이 없었어.

둘을 미리 작별 인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어.


그는 자신의 여행 끝자락에 돌아가서 여행을 통해 얻은 걸 누군가에게 말해주는 꿈을 꿨어.

그때의 조엘처럼.


몇 달 뒤, 집으로 돌아간 여행자는 졸업을 했고, 회사를 다녔고, 퇴직을 했고, 또 여러 가지일을 했어.

그렇게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어.


여행자는 요즘도 가끔 그날 조엘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

그때마다 여전히 여행을 하며 그 날 밤 그 테라스에 계속 서 있는 기분이야.

다 집으로 돌아갔는데, 여전히 혼자 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는 것 같아.

여행자는 문득 깨달았어.

때가 되면 끝내려고 시작한 여행인데, 어느새 익숙해져서,

여행을 끝내는 걸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또한 이제는 돌아갈 집이 없다는 걸.

한 번도 진정으로 집을 떠난 적이 없었기에.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코코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