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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탄게스트하우스

by 피라

타하히르 광장을 등지고 길을 건너.

인도에 올라서면 오른쪽으로 걸어가, 계속.

길은 직선이 아냐, 곡선이야, 오른쪽으로 점점 꺾일 거야.
자신감을 가져. 길도 삶과 같아.

너무 혼자 힘으로 찾으려 애써지마. 모르면 그냥 물어보면 되.

5분 정도 가다보면 둥근 로터리가 있는 교차로가 나올 거야.

왼쪽으로 꺾어 걷다가, 길이 나오면 다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

울퉁불퉁 비포장 흙길이 나올 거야. 한 눈에 재래시장골목이란 걸 알거야.

거기가 술탄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골목이야. 목적지야.

입구를 찾기 어려우니까 술탄이 어딘지 아무 가게나 들어가 물어보면 되.

다하브에서 이집트를 떠날 때 카이로로 떠나는 여행자에게 알려주었어.


술탄게스트하우스를 알려 주는 건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어.

최고의 게스트하우스였으니까.


90년대의 카이로는 초보여행자에게 혼란 그 자체였어. 해외라고는 부산 영도 섬 태종대 자살바위 전망대에서 날씨 좋은 날 대마도를 어렴풋이 본 것이 다였어. 그런 에너지를 아끼는 삶을 살다가 비행기에서 꾸벅꾸벅 졸다 눈을 떠보니, 어느 날 갑자기 불시착한 외계인이 된 거야. 물건의 가격은 물론, 이동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질서 있게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어. 모든 것이 뒤죽박죽, 그때그때 달라졌어. 예컨대 생수 한 병을 처음에는 2000원을 주고 사먹다가, 600원이면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기뻐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진짜 가격은 100원인 그런 곳이었어.


어쩌다 택시를 타면 40년은 된 듯한 클래식한 차들이라 그 더운 날씨에 에어컨은 상상도 못하지. 뒷좌석 창문을 열고 싶어도 열 수가 없어. 방법을 모르니까. 뒷좌석에서 창문을 열어 보려고 온갖 씨름을 하면 운전수가 씩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뭔가를 주지. 문고리처럼 생긴 부속이야. 뒷문의 작은 구멍에 꽂아 힘껏 돌리면 비로소 창문이 내려가지. 내리기 전에 운전수에게 그 부속품을 주는 걸 잊으면 안 돼. 하나밖에 없는 금고열쇠처럼 그 차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물건이니까, 물론 운전수가 알아서 먼저 챙기기는 하겠지만.

30년 가까이 세상의 모든 것이 공산품처럼 이름과 가격 특성, 앞으로의 일들마저 촘촘히 태그가 붙여져 군대처럼 모든 게 딱딱 정해져 있어 선택은 하나밖에 없는,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규격화되고 획일화된 나라에서 살다가. 규칙도 질서도 정해진 것은 그 어떤 것도 없이 언제라도 흐물흐물 모양을 바꾸는 것 같은 아메바, 트랜스포머 경연대회장 같은 세상에 혼자 덜렁 떨어졌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

독립 운동하러 만주로 떠나듯 중동과 유럽에서 혼자서 돈을 아끼고 아끼며 6개월 동안 여행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카이로에 처음으로 도착했는데,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숨이 막혀 빙글빙글 쓰러질 지경이었지. 돈을 아끼자니 식당 등도 현지인들이 가는 곳으로 가야하고, 그런 곳에는 영어를 하는 사람도 많지 않고, 영어로 대화하더라도 트게더(together)를 투게자라고 하는 제주도 사투리 같은 아랍식 영어발음에 익숙해지는데도 한 참 걸렸어.


아는 여행 정보라고는 단 하나, 이집트의 수도는 카이로라는 사실밖에 모른 상태에서, 날씨는 쓰러질 듯 덥고, 영어로 여행자를 상대하는 이집트인들 삐기 아니면 사기꾼 같고, 들켜도 능글능글 사기를 즐기기까지 하지, 눈에 들어오는 글자는 꼬불꼬불 지렁이 같은 아랍어에, 바가지 때문에 물도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들고, 돈은 이를 악물고 아껴야 하고, 어딜 가나 스트레스, 마음이 불편했어. 그래서 이집트를 떠나기로 했지. 카이로에 도착한 지 4일 만에.


떠나기로 결심한 그날 거리를 걷다 처음으로 한 동양인과 마주쳤어.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혼란스러운 초보여행자를 보고는 무엇보다 숙소가 중요하다며 자기가 묵고 있는 숙소로 옮기면 좋을 것 같다고 했어. 그는 매년 평균 5개월씩 4년째 배낭여행을 해왔고 이집트만 3번째인 일본인 다께또였어. 카오스같은 카이로에서 평온한 눈빛을 가진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옮겼던 숙소가 바로 술탄게스트하우스였어.

술탄게스트하우스에는 목말라하던 것들이 다 있었어. 서로의 정보를 아낌없이 나누는 마음이 열린 착한 여행자들, 진실하고 친절하고 재미있기까지 한 스텝, 무엇보다 싼 가격, 숙소 바로 앞의 미안할 정도로 싼 가격에 맛있고 푸짐한 현지인 식당, 시장초입이라 항상 재미난 삶의 모습들, 상점마다 가득가득 볼거리들. 베테랑 여행자 다께또는 초보여행자에게 짐싸는 법까지 배낭여행의 노하우를 꼼꼼하게 알려주었지. 함께 얘기하고, 먹고, 다니며 꿈꾸었던 어디서든 잘 먹고 잘 지내는 노련한 여행자가 서서히 되어갔어. 슐탄에서 하루만 자고 다음 날 떠나려고 옮겼는데, 한 달 가까이 이집트에 더 머물렀어. 이집트가 너무너무 좋아졌거든. 술탄게스트하우스는 마법이었어.


세월이 흐르면서 마법은 풀렸지.

오래전 이야기야.


이젠 모두 다 변했겠지.

하지만,

삶 어딘가에도 술탄게스트하우스가 있을 거라 믿어.


그때의 카이로처럼

견디기 어려워

어서 떠나고 싶을 때,

처음 본 사람이 알려 줄지도 몰라.


눈빛과 미소를 나누며,

한 걸음만 다가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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