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출근 길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 청취자의 사연이 생각난다.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아들이 가장 좋아했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악장을 듣고 싶다는 사연이었다. 벛꽃의 계절에 죽음과 라흐마니노프라니.
이 봄날 아침, 먼저 저 세상으로 간 자식이 가장 좋아했던 선율이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듣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한 것일까? 삶과 죽음의 대비처럼 삶을 강렬하게 말해주는 것이 또 있을까?
벚꽃의 계절이다. 언제가 절정인지 저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벚꽃이 떨어질 때가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유골함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은 온 세상이 벚꽃 천지였다. 나무에도, 길바닥에도, 그 사이에도, 고개 돌리는 곳마다 벚꽃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날이었다. 벚꽃이 피고 질 때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꽃이 피면 죽음이 떠오르고, 꽃이 지면 삶이 떠오른다.
삶 때문에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죽음 때문에 삶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삶과 죽음은 들숨과 날숨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들여 마시는 숨 없이는 내쉴 수 없고, 내쉬는 숨 없이는 들이마실 수 없다. 숨을 쉬지 못하면 죽는다.
누군가의 죽음은 누군가의 삶이다. 그가 누구더라도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삶이 가장 바닥으로 추락할때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본다. 그 높은 곳은 대단한 성취나 조건이 아니다. 단지 살아 있다는 생생한 자각이다.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 하나만 꼽으라면, 살아있음을 느끼는 생생한 자각이다. 벚꽃이 질 때가 절정이라고 여기는 건, 꽃이 떨어질 때 꽃의 존재가 가장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큼 내 삶을 생생하게 느끼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내 삶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일이 아니라, 모두의 죽음을 통해 모두의 삶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모두의 죽음과 모두의 삶을 알아가는 것, 그 긴 여정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두에 내가 포함된 것일 뿐.
벚꽃이 피고 지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다.
볼 만큼 보았다고, 경험할 만큼 경험했다고 해서 당연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꽃도 삶도 떨어질 때가 절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경지에서 살아간다면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자유로울 것 같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삶의 절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