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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책방 May 07. 2022

강의


부끄럽지만, 한 때 내가 강의를 잘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난 강의를 영화와 같은 거라 보았다. 주어진 시간 동안 상연(강연)을 위해 기승전결 흐름을 유기적으로 구성한다. 그 구성 안에는 한 편의 영화처럼 희노애락, 영웅 서사와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그 얼개 안에 내용과 메시지를 촘촘하게 넣는다. 내용이란 주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콘텐츠이고, 메시지는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환경 교육도 취업 교육도 이런 방식으로 접근했다. 


영화 도입부에 감독 소개를 하지 않듯 강사 소개하지 않을 것(환경교육),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의외의 이야기 중심으로 구성할 것, 등의 원칙으로 강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의를 듣는 사람의 관심사 파악이다.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통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다.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군인, 시민단체 활동가, 노인, 주부, 장애인, 거리의 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미리 준비된 이야기를 하는 방식의 강의를 했다. 어떤 때는 감동이 흐르는 좋은 강의였고,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았다.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이런 방식의 강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일방성이다. 


최근 교원 연수를 두 번 했다. 하나는 줌으로 진행했고, 하나는 오프라인이었다. 줌으로 진행한 강의에서는 3분의 2에 가까운 교사들이 다양한 질문을 했다. 질의와 응답으로 소통이 되었으니 괜찮은 강의라 자평한다. 한 주 뒤 오프라인 연수는 훨씬 더 소통이 될 거라 생각했다. 기대와 달랐다. 질문하는 교사가 한 명도 없었다. 의외였다. 다들 빨리 업무를 정리하고 퇴근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 그렇다 했지만, 돌아오는 내내 뭐가 문제인지 생각했다.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내게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건 일방성이다.


군더더기 없는 명징한 강의, 재미와 감동이 담긴 강의를 하는 분이 있다. 어제 그 분과 강의 행위의 일방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았다. 그리고 강의에 대한 오랜 생각(영화라는 접근)을 버리기로 했다. 내용을 만들고,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의 강의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줌강의는 조금 힘들겠지만). 


준비된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청중과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의 강의를 해야겠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방식, 인터뷰 방식의 강의를 해야겠다. 물론 그게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영화 상연 방식이라는 쉬운 방법을 선택한 것 같다. 상대가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일방적 말로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주장하는 모순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야겠다. 침묵하는 학생들 앞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또 역설하는 교장 선생님이 되면 안 되겠다. 강의가 무엇인지 다시 정의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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