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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필 May 23. 2022

질문


난 고등학교 때 질문을 많이 했다. 특정 호르몬이 폭증한 탓인지, 반항의 방법이었는지, 학구열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업 시간에 질문을 많이 했다. 수학 같은 시간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국사, 세계사, 국어, 고전, 사회 같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질문 했다. 내가 질문하면 반 친구들은 좋아했다.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해, 진도에 차질이 생겨 당황하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나 보다. 친구들은 내게 질문을 하라고 부추겼다. 고등학교 내내는 아니고,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1학기 정도까지 약 10개월 정도 기간 동안 집중적으로 질문을 많이 했다. 그 뒤로는 나도 질문의 재미를 잃었던 것 같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난 나쁜 학생이 되어가고, 선생님들께 던지는 질문으로는 답을 얻을 수 없다는 걸 안 탓이다.


국사 시간에는 "선생님, 왜 통일 신라라 부르죠? 지금의 남한과 북한처럼 발해와 신라의 분단 시대 아닌가요?"와 같은 질문을 했다. 국어 시간에는 시의 예문을 보여주고 위 부분에서 느끼는 정서는? 같은 문제의 답에 대한 보기인 1. 외로움, 2, 두려움, 3, 한, 4.상실감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문제에 대한 질문을 많이 한 기억이 난다. 


문학 작품을 읽는 독자의 감동과 정서는 주관적인데, 시를 읽고 내가 느낀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부정하고 왜 모범답이라는 '한'을 선택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었다. 이런 식으로 교육하면 작품을 통해 만나는 작가와 독자의 진실된 교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이게 작품을 대하는 바람직한 방법인가? 교육의 올바른 방법인가? 이런 식의 질문들이었다.


성의 있게 대답한 선생님은 한 분도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불만이 되어 난 계속 따져 물었다. 한 번 질문하면 짧게는 5분, 길면 30분 넘게 계속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따져 묻는 논쟁이었다. 계속 물으면 때리는 선생님도 있었다. 교무실로 끌려가 정신적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질문했다. 그 중 성의 있게 대답해 준 선생님의 답은 이렇다. "공부한다는 것은 모범답을 알아가는 과정이고, 설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모범답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였다. 그건 그냥 우리가 맞다고 하는 걸 너희들도 맞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그때부터 공부가 시시해졌던 것 같고, 질문도 더 이상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교사들은 내 질문이 수업에 방해가 된다고 했다. 진도에 차질이 생긴다고 했다. 친구들이 부추겨서 선생님을 골턍 먹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궁금함이 더 컸다.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조용히 구글링하는 인생이 되어버렸지만, 아직 가시지 않는 궁금함이 하나 있다. 학생의 질문에 대답해 주거나, 학생과 생각을 나누는 시간보다 진도를 나가는 것이 왜 더 중요한 교육이 되어야 하는가? 그런 교육은 누구를 위한 교육인가? 진도를 위한 교육인가? 


교사들과 토의토론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진도 때문에 따로 시간 내기가 힘들단다. 우리나라 교육은 참 일관되다는 생각이 든다. 1988년대 교실이나 2022년 교실이나 수업의 주인공은 <진도>다. 진도 때문에 학생의 질문한 권리도, 개별 교사의 수업에 자율권도 침해받는 상황이다. 물론 진도 문제나, 교사 자율권은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 본다. 하지만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때가 아닐까? 개별 맞춤형 교육이 트랜드가 되면 수업은 어쩔 수 없이 의사소통 중심의 교육이 되리라 본다. 의사소통의 수단이  차가운 시스템인가? 따뜻한 말을 주고받는 사람인가를 차이일뿐.


정치나 행정의 문제도 그렇겠지만, 특히 교육의 문제는 모두 다 문제를 알고 있는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문제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문제 제기가 새삼 새로울 것이 없다. 새로울 것이 없으니 문제에도 답에도 별 관심이 없다. 이미 익숙한 문제를 학생이 질문하면 그냥 혹은 대충 넘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가 생기는 듯하다. 오래된 문제는 익숙한 생각으로 좀처럼 해결되지 않고,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법이다. 스스로  매몰된 익숙함으로 무시하거나 대충 넘어가면 질문하지 않는 사회가 된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 다양한 질문에 귀 기울이지 않는 위험하다. 박물관의 유물이나 폐허 같은 사회로 향하기 때문이다. 문득 질문이 떠오른다. '나는 이미 유물이나 폐허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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