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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by 피라


작은 형과 통화했다. 이렇게 일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6월달까지만 일하고 그만두겠다고 대표에게 말했단다.


잘했다고 하면서, 그래도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일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일이란 뭘까? 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들,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 직접적 원인이 되는 산재도 많지만, 일이 간접적 원인이 되어 죽는 사람들도 많다. 일로 인한 스트레스를 달고 사는 건 기본이다. 월급이라는 건 스트레스의 댓가라 믿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대의 임금 노동자란 돈 받는 노예일까? 자신의 일이 가치있다고 여긴다면 노예도 자유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자유로운 조건에서도 스스로를 옥죈다면 노예일까? 억압된 조건에서도 스스로 해방감을 느낀다면 자유인일까? 상황에 따라 경계가 모호해 양분할 수 없겠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세포는 30조~100조개라 한다. 내 안에 수십조개의 세포 하나하나가 일하는 한 명 한 명의 사람들 같다. 세포들도 자유와 구속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건 아닐까?


한국 교육이 내게 심어준 교육적 가치는 <지금을 참고 견디면 나중에 좋다>다. 공부하는 것이 괴롭고 힘들어도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대학을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지고, 행복하게 산다였다. 거의 모든 선생님이 같은 말을 했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거의 모든 학생들은 그렇게 믿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신념으로 학생들이 아침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학교로 향한다. 학생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는 것과 노예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참고 견디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학생과 노예의 차이가 무엇인지 문득 궁금하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아무리 좋은 대학을 가도, 아무리 좋은 직업을 가져도 그런 조건이 인간의 행복과 별 상관이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될테니, 공부도 일도 모두 허망하다는 깨달아야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시키는대로만 사는 삶이 노예라 생각한다. 부모의 결정만 기다리는 아이는 노예다. 교사가 말하는 걸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해야 한다면 교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학생이 아니라, 노예다. 상사가 말하는 걸 무조건 묵묵히 해야 한다면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람은 회사원이 아니라 노예다.


중고등학교 시절, 우리의 미래를 위해 일단 무조건 참고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한 선생님들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니 그들이 틀린 것 같다. 그들이 말한 행복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을 미루고 해야 하는 것을 억지로 하는 삶을 사는 사람에게 행복한 미래란 언제나 몇 년 뒤에 도래하는 신기루 같은 것이다. 10대에도 행복한 미래는 몇 년 뒤에 오는 것이었고, 20대에도 몇 년 뒤에 오는 것이었고, 30대에도 몇 년 뒤에 오는 것이었고, 40대에도 몇 년 뒤에 오는 것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이 순간에 나의 모든 것을 바치는 온전히 행복한 시간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니, 행복한 삶은 언제나 미래의 어느 순간에 머물러 있다. 노예란 어쩌면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미래로 미루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각자의 선택만이 진실일뿐 노예로 살든, 자유인으로 살든 중요치 않다. 아무도 타인의 선택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죽는 길이 아니라 사는 길을 선택했으면 좋겠다. 공부를 하다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학생, 일을 하다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살아있는 사람은 무언가를 살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무언가가 자신이든, 타인이든, 세상의 모든 존재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답시고 스스로를 죽이고, 세상을 죽이는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육이 시작되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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