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니, 나도 잘 했던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게임이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게임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오락이라고 했다. 안마 의자나 파칭코 기계같은 코인 오락기들을 놓아두고 장사하는 곳을 오락실이라고 불렀다. 오락실은 어른, 초중고생들이 바글바글한 곳이었다. 그때 가장 인기 있는 오락은 갤러그였다. 부산 사람들은 갈라가라고 불렀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갈라가에 미쳤었다. 대신동 문화아파트 지하상가에 커다란 오락실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갔다. 100원짜리 동전을 손에 꽉 쥐고, 1킬로 정도의 거리를 뛰어갔다. 인파 속을 달리며 마주치는 사람들은 내가 피해야 할 총알이라고 생각하며 더욱 속도를 내며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온갖 오락기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와 우굴대는 사람들을 헤치며 고수를 찾았다. 내가 원하는 절대 고수는 아니더라도, 갤러그를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갤러그를 하고 있으면 뒤에 서서 어떻게 하는지를 관찰했다. 간혹 절대고수가 나타나면 10여명 넘는 사람들이 감탄하고 구경했다. 나도 틈사리에 끼어 그 사람이 어떻게 게임을 하는지 관찰하며 배웠다. 갤러그 100만점을 넘는 사람, 100판을 넘게 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게임이 끝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나의 영웅, 나의 스승이 일어나서 걸어가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갤러그는 한 스테이지를 끝낼때마다 난이도가 조금씩 올라가는 구조인데, 스테이지가(판)를 마칠 때마다 오른편 하단에 계급장 같은 것이 표시되었다. 50판이 가장 큰 단위였다. 50판은 흰색 역오각형에 빨간색 브이자가 새겨진 문양이었다. 겨우 2,3판을 넘기는 것이 한계였던 어린 내게 50판은 전교 1등보다 훨씬 가치있는 꿈의 목표였다.
오락실에 가면 평균 2시간을 머물렀다. 호주머니에 넣은 100원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고수들의 게임을 1시간 정도 관찰했다. 머리 속으로 내가 게임을 하고 있는 듯 시뮬레이션하며 구경을 하다가, 뭔가 배웠고, 그걸 시도할 자신이 생기면, 100원 동전을 넣고 나도 한 판 해 보았다. 나의 게임이 끝나면 다시 1시간 정도 고수의 게임을 보며, 내가 했던 게임을 복기하며 또 배웠다. 매일 매일 그런 시간을 두 달 정도 보내었다. 나의 갤러그 실력은 나날이 나아졌다. 얼마 뒤, 나도 50판 계급장을 달았고, 100만점을 넘겼다. 그 뒤로 얼마 뒤, 규모가 작은 오락실(주인이 모든 걸 다 볼 수 있는)에서 내가 갤러그를 하면 주인이 전원을 꺼버리거나 게임을 못하게 막는 일이 종종 생겼다. 내가 갤러그를 시작하면 2,3시간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게임을 하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못하고, 오락실 주인은 돈을 벌 수 없으니, 영업방해라며 전원을 꺼버렸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갤러그를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의 오락실에 가면 쫓겨나는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지역의 오락실을 찾아 다녔다. 다른 동네에 가면 그 동네의 고수를 발견하기도 했다. 도장깨기처럼 무언의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기록을 깨면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며 어린 놈이 대단하다며 신기해했다. 주인이 전원을 꺼려고 하면, 어떤 어른들은 주인과 싸웠다. 이런 건 처음이니 더 봐야 한다며.
중학교 1학년까지는 간혹 오락실에 갔다. 정점을 찍은 후 갤러그는 내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제비우스, 미스트도, 뽀글뽀글, 야구도 자주 했고, 너구리 같은 건 맥주 10판 이상 갈만큼 웬만큼 잘했지만 점점 게임에 대한 흥미가 떨어졌다. 갤러그로 최고가 되었다고 생각한 뒤부터다. 새로운 오락이 나와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때부터다. 게임과 담을 쌓고 지내게 된 것이. 요즘은 게임을 모르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다. 삶은 모순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 이유가 한 때 최고였던 경험 때문이니. 이게 다 갤러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