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래도 대략 1,000명 전후인 듯 하다. 기업에서 일할 때 한 해에 채용했던 사람의 숫자다. 그런 일이 지긋지긋해서 퇴직했는데, 그 일의 경험으로 먹고 사는 아이러니가 내 삶이다. 회사 다닐 때 여기를 떠나야겠다 마음 먹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 자잘한 일들이 많았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한 해에 1,000명씩 사람을 뽑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력운영 계획을 수립해 분기마다 수정 운영하며, 채용 공고를 내고, 채용 문의 전화를 받고, 서류전형을 하고, 면접자에게 전화 안내를 하고, 면접관이 되어 면접을 보고, 합격, 입사, 부서배치 때마다 결제를 올리고, 수습평가 제도를 만들어 수습 평가를 해고, 현업의 인사 문제가 생기면 대응을 하고(불화, 고충, 사고, 태업, 휴퇴직 등), 퇴직 면담을 하고, 외부기관에 채용 계획을 알려주고, 장애인고용부담금, 보훈업무를 하고, 직업계고 학생들 면접을을 위해 전국 학교를 돌아다녔다. 이 모든 일을 2명이서 했다. 코피가 몇 번 터지고 나서 일을 도와줄 사람 2명이 충원되기는 했다. 그래도 7시 50분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하는 일상은 계속되었다. 낮에는 각종 전화(인사관련 현업부서 전화, 채용 문의 전화)를 받으라 일을 못하고, 면접을 보느라 일을 못했다. 회사 식당에서 저녁밥을 먹고 커피와 담배로 리셋을 한 후, 8시쯤에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하는 루틴이었다. 한 달에 밤 1시 퇴근도 절반이상이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엔지니어인 동기들도 그렇고 대부분 그렇게 일했다. 난 100일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출근해 일한 적도 있다. 한 동기는 6개월 동안 하루도 안 쉬고 일한 적 있다고 했다. 그 동기는 드디어 쉬는 날 집에 가려고 하니 계절이 바뀌어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집에 갔다고 했다. 가끔 친구 전화가 오면 통화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바쁘다, 이따 전화할게'라며 끊고 잊어버리곤 했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낮이고 밤이고 일하고 있는 상태를 친구들에게 설명할 힘도 없었다. 퇴직 후 다니던 취준생들이 내가 다니던 회사를 '아오지 탄광'이라고 부르는 걸 알았다.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했다. 내가 입사했을 때 임직원이 2,400명이었는데, 4년 후 퇴직할 때는 9,000명이 넘었다. 한 해에 200~300명 퇴직자까지 발생했다. 한 때는 퇴직 면담까지 일일이 하기도 했다. 퇴직 후에는 2만 명이 넘는 기업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힘들게 힘들게 증원과 충원 계획에 맞는 인력을 채용했다. 직업계고에 학생들을 채용해서 입사 대기를 시켜 놓을 때, 대략의 입사 시기를 학교에 알려준다. 그 해는 입사 시기가 밀렸다. 해는 절대 넘기지 않을 거라며 학교에 신신당부를 했다. 드디어 12월 초에 입사 안내 공문을 기다리던 몇 학교에 보냈다. 손꼽아 기다리던 학생들은 두렵고 설레는 마음으로 입사 준비를 했다. 그때다. 인사팀장이 신입 사원 입사를 내년으로 연기하라고 했다.(80여 명쯤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연말에 성과급이 나가는데 성과급 지급 기준이 지급 시점의 재직자이고, 신입사원들도 30만원의 성과급을 받게 되니, 이 돈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1억 정도는 비빔밥 한 그릇 사 먹는 돈으로 여기는 천문학적 돈을 버는 회사에서 그야말로 껌값도 되지 않는 돈을 아끼려고 무리수를 둔 것이다. 회사입장에서는 1원도 아깝겠지만, 입사하지마자 성과급 30만원을 받았다고 하면 본인은 물론 친구 가족들이 얼마나 회사 자랑을 할까? 그런 무형의 가치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일차원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의 업무 지시를 받는다는 사실이 처참했다. 우겼다. 입사 연기는 안 된다고 설득하고 설득했다. 학교와 약속했고, 공문까지 보냈으니 신뢰의 문제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우리가 졌다.
입사 연기 공문을 학교에 보내고, 선물을 사들고 학교를 찾아다니면서 사과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대기 학생들을 입사시키려고 했지만 학생들은 기다림에 지쳐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부족한 인원을 채우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또 채용을 했다. 12월에 그 일이 시작되고, 3월 초가 되어서야 인력 부족 문제를 겨우 해결했다.
한 푼이라도 아끼며 인력 운영을 하는 자신의 충정을 윗선에 보여주려는 어리석은 상사(인사팀장)가 미웠다. 3월 말은 내 생일이다. 생일 기념 부서회식을 하는 날, 참아왔던 것이 폭발했다. 필름이 반쯤 끊긴 상태에서 인사팀장에게 참아왔던 말을 내 쏟았다. 무슨 말을 했는지 뚜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할 말을 한 것 같다. 다음 날 마음이 한 결 가벼웠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남는다. 그런 상황이 다시 온다면, 입사 연기가 안 된다는 말을 팀장에게만 하지 않을 것이다. 상무에게 밀하고, 오너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때 일할 때는 위계질서, 의사결정라인을 지키는 것이 철칙이었기 때문에 그런 방법은 생각도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팀장까지였다. 그 다음부터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믿었다. 모두 그렇게 일했다. 특히 내가 일한 곳은 공장문화라 그런 위계질서가 강했다. 정말 아니다 싶으면 NO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NO라고 말하는 대상이 동료, 사수, 팀장에서 끝내면 안 된다 생각한다. 노력해도 안 된다고 포기 말고 뜻이 관철될 수 있도록 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다하다 안 되면 또라이, 내부고발자, 공공의 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고 싶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대기업 회장도 옆집 아저씨처럼 편하게 대하며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일하는 싶다. 그래야 나도 배우고 기업에도 된다. 학생과 청년들도 눈치나 보며 시키는 것만 고분고분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호연지기를 품고 공부하고 일하면 좋겠다. 지나고 보니 그렇게 일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자신을 일을 제대로 하려면 그 일에 대해서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난 비겁하게 일했다. 닭장에 갇혀 항생제 섞인 사료를 먹는 것이 최선이라며 여기며 자신을 속였다. 최선을 다하는 삶이란 최선을 다해 표현하고 행동하는 삶이다. 그때의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르겠지만 노력하며 살아야겠다. 노력의 시작을 위해 일단 생각하고, 글로 끄적거려 본다. 뒤늦게 일에 대해 생각하고 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부끄러운 내 과거 때문이다. 난 이미 틀렸을지 몰라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들은 나처럼 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