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는 '인간의 잠'이 경쟁 상대라고 말했다. 수업시간, 근무시간, 사람을 만났을 때 영화를 보기는 힘들다. 넷플릭스가 제공하는 영화를 보려면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넷플릭스 사업은 잠과의 싸움이다.
성장하기 위해 잠과 싸우는 건 넷플릭스만의 일이 아니다. 학생들도 잠과 싸우고, 직장인도 잠과 싸운다. "언제 한 번 잠을 실컷 자 봤으면...."이라는 바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많다. 공부를 포기한 학생들도 학교에 가기 위해 잠과 싸운다. 곧 회사를 그만 둘 사람도 출근을 위해 잠과 싸운다. 백수가 되어 지난한 시도를 해보다 꿈도 희망도 사라지고 자신과 세상에 대해 한 치의 바람도 없는 상태쯤 되면 드디어 잠을 실컷 잘 수 있다. 낮이든 밤이든 영화를 실컷 볼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전기가 끊길 걱정에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잠의 역설이다. 그쯤 되면 잠을 자도자도 피곤하다. 인간이 한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건 경제적으로 생존할만 상태에서 여유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넷플릭스의 지속가능한 사업 성장을 위해 개개인 삶의 질을 높이는 사회복지에 관심을 기울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자고 싶을 때 잠을 자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한다는 것은 내 삶은 내가 결정한다는 인간 존엄성 표현의 일상 버전이다. 자신 삶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가지지 못한다면 노예에 가깝다. 육아와 교육의 목적은 하루라도 빨리 아이들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 나가는 지혜와 지식을 갖춰주는 것이다. 삶의 결정이란 문제 해결 과정이다. 먹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스스로 냉장고 문을 열어 음식을 꺼내 먹고, 뒷정리까지 하는 것부터 성인이 되어서 스스로 돈을 벌고 지속가능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것 모두 문제 해결이다. 문제란 현 상태와 바람 사이의 간극을 줄이는 과정이다. 간극의 틈새를 채우는 욕망의 대부분을 돈이 해결해 준다고 믿으니 돈에 점점 집착하게 된다. 나이 들수록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늘어난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문제로부터 도망치거나, 문제 속으로 들어가 간극을 줄이거나 없애는 방법이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해결되는 문제도 많지만(이럴 때 주로 회피를 선택한다), 가만히 놔두면 점점 커져 걷잡을 수 없는 문제도 있다. 민들레 홀씨같은 문제였는데, 자라고 자라 삶을 삼키고 세상을 삼키는 문제도 있다. 원치 않는 임신은 그 중 하나다.
미국 헌법재판소에서 여성의 임신중단권을 폐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제의 싹을 없애는 문제해결 방법은 불법이니 애초에 문제의 싹이 생기지 않도록 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너희들의 문제 해결에 우리는 관심 없으니 너희들 알아서 해라는 말 같다.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결정권을 주어야 하는데, 여성의 삶, 여성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박탈하고서 알아서 해결하라는 건 모순 아닐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교육적 의미를 담은 것 같기도 하다. 만약 그렇다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대에 가는 것이니, 서울대에 가지 못한 책임은 최저임금과 반지하에서 평생 살아가는 삶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공부와 직업으로 사회적 인정만 받아온 이들이라 사람의 인생은 자신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걸까?
모든 인간이 자신 삶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지녔으면 좋겠다. 삶에 대한 결정권은 자신 몸에 대한 결정권으로부터 시작된다. 진로 교육도 마찬가지라 본다. 부모의 강압으로 노예처럼 공부해서 원치 않는 의대에 입학한 후 세월이 흘러 스스로 만족하며 독재자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그런 비자발적인 모델이 진로 교육의 표준이 되면 곤란하다. 부모의 강압을 못 이겨 자살한 아이들의 숫자와 부모의 강압을 참고 견딘 댓가로 행복하게 사는 아이들의 통계도 없이 말이다. 긍정적 통계가 있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진로를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강압과 회유로 자신의 진로를 결정한 100명 중의 아이들 중 99명이 성공하고, 단 1명이 불행해진다 해도 마찬가지다. 결과에 상관없이 아이 스스로의 선택권을 박탈하는 것은 그 자체로 비교육적이다. 교육 이전에 인권의 문제다. 자신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은 결과와 연관지을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 자체가 삶의 목적이자 의미다.
자신의 몸과 삶에 대한 결정권 뱍탈에 대한 반발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 중 구글도 나서서 여성직원들에 대한 임신중단권을 보장하겠다고 말했다. 정부가 시민 개개인의 삶을 부모처럼 헤아리고 돌봐주지 않는다면, 특히 약자들의 삶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정부의 자리는 기업에 내어줄 것 같다. 다수의 더 나은 삶을 위한 생산적인 행위는 없이 정치인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정부 조직보다는 재미있고 감동적인 영화를 제공하고, 자신 몸에 대한 결정권을 보장해주는 기업을 선택할 것 같다. 그런 기업이 있다면 잠을 줄여서라도 자신의 정부가 되어 달라고 기꺼이 뭔가를 할 것 같다. 나도 그런 마음이 생긴다. 기업이 정부의 역할을 하는 사회는 영화 속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재형이다. 사회적 가치와 개개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며 도움주는 기업이 성장하는 시대가 된 것 같다. 힘들고 복잡한 시대다. 디스토피아가 될 지, 유토피아가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