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여름은 바다다. 부산은 도심에 해수욕장이 5개 있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가 떠오르는 다대포, 낭만의 바다 광안리, 바닷물 좀 아는 사람이 즐겨 찾는 송정, 달맞이로 유명했던 해운대, 한국 해수욕장의 원조인 송도다. 송도 해수욕장은 한 때 한국의 제주도였다. 60, 70년대에 인기있는 신혼여행지였다 한다. 좀 더 깊은 물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은 송정 위쪽의 일광, 월내, 진하 해수욕장을 찾았다. 부산 사람들이 5분에서 1시간 정도에 갈 수 있는 해수욕장이 8곳이나 된다.
부산은 매립의 도시다. 일제 시대에 부산 연안의 대부분은 매립되었다. 그들은 연안을 매립해서 땅 장사를 했다. 매립하기 전의 부산 연안은 천혜의 해수욕장들로 둘러 쌓인 곳이었다. 초량처럼 해운대 뺨치는 백사장이 펼쳐진 곳도 있었고, 태종대처럼 자갈밭 해안도 있었다. 자갈치는 거제도 몽돌해수욕장 만큼, 혹은 그 보다 더 아름다운 곳이었으리라. 부산진, 수영, 초량, 좌천, 범일, 문현, 영도 등 셀 수 없는 부산의 연안은 모두 고기를 잡고, 아이들이 수영을 하던 곳이었으리라, 모르긴 해도 발리보다 멋진 곳 아니었을까? 연안 매립의 역사는 해방 후에도 이어졌다. 내가 사는 영도섬만 해도 연안의 3분의 1정도가 7, 80년대에 매립되었다. 내가 사는 청학동에도 작은 백사장이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수영을 즐겼다 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동삼동 앞바다에 연안에 물개가 서식했다 한다. 총을 구해 물개 사냥을 했다는 놀라운 경험담을 주민으로부터 들었다. 지금 남아 있는 부산의 해수욕장은 아마존 숲이 모두 사라지고, 큰 나무 몇 그루만 남은 것과 같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부산 출신이라고 해서 모두 수영을 잘하지 않는다. 학생 시절 강이나 바닷가에 가면, "나는 영도 물개다!"라고 외치며 물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다. 바다에서 태어나 자라도 수영과 담 쌓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마흔이 넘도록 수영이라는 걸 해 본 적도, 배울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내게 바다와 강, 호수는 멀찍이서 바라보는 풍경일뿐 그 속으로 들어가는 건 공포와 죽음이었다. 43살이 되던 해에 한 라디오에서 취미로 매일 1킬로미터씩 수영한다는 어떤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홀린 듯 그날 바로 수영 강습을 등록했다. 그때는 익숙하지 않는 것, 못하는 것, 평생 거부했던 것을 해봐야 정신이 성장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때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이듬해였다.
첫 수영 한 달 동안은 너무 힘들었다. 물에만 들어가면 긴장이 되고, 강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바지를 입을 때 한 쪽 다리를 들 없을 정도로 힘이 없었다. 호흡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 거의 숨을 참은 상태에서 물 속에 고개를 쳐박고 발차기를 하며 풀을 왔다 하니 근육에 산소에 제대로 공급 안 된 탓 같았다. 군대 제대하면 못할 일이 없다고 느끼듯, 수영만 배운다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습을 통해 3개월 동안 열심히 수영을 배운 뒤 치앙마이로 떠났다. 가장 먼저 한 것은 치앙마이 대학교의 수영장 회원권을 끊은 일이었다. 1,2월의 치앙마이는 우리나라 늦여름, 초가을 날씨다. 낮에도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분다. 치앙마이 대학교 수영장의 물은 차가웠다. 몸이 덜덜 떨렸다. 수영장에서 추위를 이기는 법은 수영하는 길 밖에 없다. 하지만 그때 나는 물장구 수준의 수영만 할 뿐 지속적으로 수영을 할 수 없었다. 치앙마이 대학교 수영장은 수영 경기장 규격의 50미터 풀이었다. 25미터 지점부터는 물 깊이가 2미터가 넘었다. 그때 입영도 할 수 없었고,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어야 겨우 25미터를 나갈 수 있는 상태였다. 25미터를 수영하면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쉬어도 탈진한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 그때 소원은 가만히 서서 팔다리만 살랑살랑 저어도 물에 떠 있을 수 있는 입영, 25미터를 여유롭게 수영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떨지 않고 수영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수영장 한 켠 얕은 물에서 연습 할 때도 추웠고,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는 수영장에서 샤워 할 때도 추웠고, 옷을 갈아입고 숙소로 돌아갈 때도 추웠다. 어찌나 추웠던지 수영을 마치고 한 시간 동안은 몸이 덜덜 떨렸다. 그래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그 짓을 했다. 그만큼 수영을 푹 빠졌었다.
그 해 치앙마이에 머물면서 매일 물장구 수영을 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수영 동영상을 보며 공부했다. 두 달이 지나도 나의 수영 실력은 하나도 나아지지 않았다. 두 달 동안 수영을 배우려고 혼자 발버둥쳤다는 사실만 남았을 뿐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수영 강습을 시작했다. 봄이 되자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25미터를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고, 쇠막대기 같은 몸이 조금씩 물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수영 강습을 10년 이상 한 베테랑 아주머니들은 그런 느낌을 "물을 탄다"라고 말했다. 물을 타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수영 거리를 조금씩 늘려갔고, 그해 여름쯤에 드디어 호흡이 트였다. 1킬로 수영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때의 기쁨과 성취감은 형용할 수 없다. 1킬로라는 목표를 이루자, 나는 반쯤 미쳐버렸다. 수영에 미친 사람이 된 것이었다. 수미사(수영에 미친 사람들의 모임)라는 온라인 카페에 접속해 나보다 더 미친 사람들을 보며 더 열심히 수영해야겠다 마음을 다졌다. 매일 1킬로씩 수영했다.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 수영장에 가기도 했다. 자나깨나 머리 속에 수영 생각밖에 없었다. 장거리 수영에 빠진 상태로 1년 넘는 시간을 보내니, 변화가 생겼다. 어깨가 아팠다. 어떤 날은 팔을 올릴 수도 없었고, 세수도 하기 힘들었다. 병원에 가보니 어깨가 망가졌다고 했다. 인대와 근육의 상태가 엉망이라 했다. 회전근개염이라 했다. 어깨를 쓰지 말아야 한다 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장거리는 자제했지만, 수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때 사람은 마약에만 중독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최대한 조심하며 수영을 계속 했다. 어깨가 아픈 것은 그냥 내 운명이고, 수영을 해야 하는 것도 내 운명이라 생각했다. 어깨가 아파도 행복했다. 수영할 수 있었으니.
그런 수영에 대한 열정에 브레이크를 건 건 육아였다. 아이가 태어나자 수영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6년이 지났다. 어제 마흔 넘어 수영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분을 만났다. 그 분과 대화하니 나도 다시 수영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일주일에 한 번 자유 수영이라도 해야겠다. 오래 동안 수영하지 않은 어깨를 돌려보니 이제 아프지 않다. 내가 수영에 빠졌던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가장 컸던 이유는 힘 빼는 법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물에 둥둥 떠 있다가 잠수를 하고 물 속에서 자유롭게 온갖 동작으로 유영하는 걸 가장 좋아한다. 물과 하나 되어 물의 저항을 나의 에너지로 변화되는 감을 느끼며 천천히 유영할 때면 인생도 이렇게 유영하듯 살고 싶고 싶다는 걸 느낀다. 시작은 힘을 빼는 것이고, 물의 저항을 나의 운동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과정이다. 우리는 거대한 어항 속에 사는 물고기와 같다. 물과 다투지 말고 물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싶다. 수영으로 그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것이다. 수영을 다시 생각하니 설렌다. 수영이 설렌다는 건 삶이 설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액정 꺼진 수영 시계를 찾아 배터리를 갈아 넣어야겠다.
P.S : 아래 사진은 개항 당시 부산 초량의 모습이다. 상상도 못했던 백사장이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처음 보았을 때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했다. 저 시절을 감히 모르지만, 사라진 부산의 자연 환경이 애틋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