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러햄 링컨은 두 번째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1790년부터 1860년까지의 인구조사 내용 중 매 10년 동안의 미국 인구증가율을 언급했다. 10년당 평균 인구증가율은 34.60퍼센트였다. 링컨은 70년 동안 미국의 평균 인구증가율이 항상 34.60퍼센트를 기준으로 위 아래 2퍼센트 이내였다고 말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미국 인구 증가율 수치에서 보듯, 증가율의 폭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이는 인구 증가율 법칙이 꽤 믿을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는 10년당 34.60퍼센트라는 인구증가의 법칙을 적용해 70년 후인 1930년에는 미국 인구가 2억 5,168만 914명이될 것이라 예측했다. 이렇게 링컨은 과거의 추세를 바탕으로 경솔하고도 근거 없는 예측을 했다. 1930년 미국의 실제 인구는 1억 2,300만 명으로, 링컨이 예측한 숫자의 절반도 안 되었다.
데이터는 그저 데이터일 뿐이다. 명확한 패턴을 찾았다고 해도 이 패턴이 단순한 우연 이상이라고 확신하려면 논리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이론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데이터는 투기적인 주식시장의 거품을 부채질하거나 거품의 환상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거품과 거짓 경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이론을 현상에 대입해보면 된다. 데이타만으로는 진짜 거품과 거짓 경보를 구분할 수 없다.
- 숫자를 읽는 힘, 게리스미스 -
우리는 데이터의 함정에 빠져 살아가는 것 아닐까? 80년대까지만 해도 인구 증가는 정부의 큰 골칫거리였다. 데이터 분석 결과 이대로 가다가는 인구 증가 때문에 국가적 재앙이 일어날 것 같았다. 지금은 인구 감소가 문제다. 출산율 증가를 위해 380조를 쏟아 부어도 출산율은 줄어들기만 한다. 한 때는 인구 폭발로 나라가 망할 것 같다가, 한 때는 인구 감소로 나라가 망할 것 같다. 데이터 추이를 통한 예측이 현실이 된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데이터뿐 아니 데이터를 해석하는 의심하기 힘든 이론이 있더라도 예측과 실제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사람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 지난 10년, 지난 20년 간의 삶의 추이를 통해 우리는 냉탕과 온탕을 왔다갔다 한다. 짧게는 지난 1년, 어제 치른 시험 결과를 통해 절망과 희망의 사다리를 탄다. 데이터로 자신 삶을 해석하고 예측한다. 잘못된 데이터 해석과 예측으로 앞으로의 삶을 규정한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진짜 삶을 시작조차 해보지 못하고 데이터의 함정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는 학생들이다.
데이터는 정보다. 우리는 정보를 통해 살아간다. 삶이란 정보와 나의 상호작용이다. 정보를 해석하고, 정보를 통한 예측으로 삶을 살기 때문이다. 먹구름이 끼고 습한 느낌이 들면 비를 예측하고, 공부를 하지 않으면 시험 점수가 형편 없을 거라 예측한다.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형편없는 삶을 살 것이라 예측하고, 돈이 부족하면 삶은 불행해질 거라 예측한다.
삶에 힘이 되는 교육, 의미 있는 교육은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법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 같다. 학생의 머리에 데이터를 집어 넣어 넣어 얼마나 담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교육이 아니라, 데이터를 얼마나 잘 해석할 수 있는지, 해석된 데이터를 가치 있게 활용하는 방법을 평가하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교실에서는 집단 의사소통을 통한 문제해결 역량, 교실 밖에서는 직무 역량이라고 부르는 능력 말이다. 시키는 일, 입력과 출력이 정해진 직무 수행 역량이 아니라,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역량이 진짜 직무 역량이다. 다양한 관점, 다양한 방식의 데이터 해석과 활용 능력은 미지의 가치를 찾아 실현시키는 힘이다. 일과 삶이 통합된 진짜 역량을 발휘하는 사람이 많아지도록 기업과 학교의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더 나은 세상, 더 나은 삶은 그런 방식으로 다가올 거라 믿는다.
내 인생을 구성하고 있는 나의 데이터, 그것을 해석하는 나, 세상을 구성하는 세상의 데이터, 그것을 해석하는 나를 돌아보는 교육을 해야 한다. 학생은 물론 성인에게도 절실한 교육이다. 무엇보다 내게 필요한 교육이다.
극단적 우울증과 분노처럼 잘못된 데이터에 속고, 잘못된 데이터 해석으로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일은 최소한 없었으면 한다. 숱한 정보의 입력과 해석으로 인해 피폐해지는 삶이 아니라, 건강하게 자라나는 삶이 되면 좋겠다. 그 과정에서 일을 잘하는 능력을 스스로 키울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런 교육을 하면 좋겠다.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이 하는 일로 설명된다. 일은 한 인간의 정체성이다. 일이란 돈을 받고 하는 일뿐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행동 자체다. 생각과 행동이 일관되고 지속성을 지니면 그 사람의 일이 된다. 그 일로 댓가를 받으면 직업이 된다.
삶이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과정이고, 일이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구체적 연결 고리다. 좋은 대학에 가는 이유는 스스로 오만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다. 좋은 일이란 무엇인지, 일을 잘하려면 어떤 능력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에 집중하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그 과정에 필요한 수많은 영역의 사실적 지식이 교과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주객이 전도된 현실적 교육을 하면 좋겠다. 일이 주가 되고, 일이 최종 목적지가 되는 교육을 하면 좋겠다. 일다운 일이 무엇인지, 일 속의 가치와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는 교육을 하면 좋겠다. 일 속에 철학과 문화, 과학과 인문학, 세상과 학생 개개인을 담아내는 교육을 하면 좋겠다.
그렇게 공부를 하면서도 공부가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듯, 그렇게 일하면서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스스로 삶을 도구로 만드는 태도다. 일을 통해 자부심을 느끼고 일과 삶의 모순을 느끼지 않고 당당히 자신 일의 바닥까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일에 대해 당당하다는 것은 삶 역시 그렇다는 뜻이다. 일을 통해 오만이나 부끄러움을 가지지 않고, 일을 통해 겸손함과 당당함을 느끼고, 이타심과 이기심의 조화를 깨닫는 사람이 많아지길 바란다.
삶의 문제는 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대부분 풀린다. 취업을 하는 것, 취업을 위해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은 일의 문제를 푸는 방법이 아니다. 일 속에 나와 세상을 자신의 방식으로 담아내는 다양한 능력을 갖춰야 일의 문제가 풀린다. 교육의 본질이 담긴 일교육이 필요하다.
그런 교육을 받으면 숱한 진짜와 가짜 데이터, 수많은 해석, 수많은 예측 오류 속에서도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리라 믿는다. 일이라 부르든 인생이라 부르든 사랑이라 부르든 넘어지지 않는 힘, 넘어지더라도 일어서는 힘, 넘어진 자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 힘, 넘어진 걸 절망으로 여기지 않는 힘, 넘어진 자에게 손을 내미는 힘, 홀로 우뚝 서는 힘이 길러질 거라 믿는다.
수많은 넘어짐 속에서 아이는 비로소 걸을 수 있다. 넘어지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고 지켜보고 기다릴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성적으로 인해, 대학으로 인해 자빠져 일어설 수 없다 여기는 아이들을 일교육으로 일으켜 세우고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게 만들 수 있다 믿는다. 이제부터 교육이 그렇게 바뀌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