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 사회에서 데이터는 곧 돈이다. 성장하는 글로벌 기업은 모두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데이터로 사업을 성장시키고 데이터로 돈을 번다. 데이터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데이터를 다루는 능력이다. 데이터를 다루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데이터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다면 데이터 자체는 의미가 없다. 컴퓨터 저장 장치나 클라우드에 잔뜩 쌓인 파일은 아무 의미없다. 데이터가 지닌 의미를 찾고 목적에 맞게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능력과 만나야 의미있는 데이터로 다시 태어난다. 글을 쓰는 사람이나 크리에이터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에 자신이 가진 데이터를 자랑하는 사람을 간혹 만난다. 그 동안 쓴 글은 단행본 수십권 분량이라고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 모아 놓은 자료들이 곧 자신의 능력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 목적에 맞게 구체적으로 재구성되지 않고 데이터는 싱크대에 잔뜩 쌓인 그릇 같다. 당장 담을 그릇으로 쓰이지 못한다는 뜻이다. 만지고 씻고 닦고 제자리에 두며 다음에 어떻게 쓰일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은 데이터는 쓰레기의 다른 이름이다. 정보의 바다란 쓰레기의 바다다. 온갖 과장과 축소 왜곡으로 희석된 정보들 속에서 의미있는 정보를 찾아 재구성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광고성 정보는 오히려 정직하다. 정보의 목적과 속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일을 잘하며 삶을 잘 사는 능력은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데이터를 어떻게 처리하며 어떻게 재구성하는가에 달려 있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의 문제도 데이터의 문제와 같다. 음식의 정체성은 데이터이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온갖 데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는 데이터를 해석해서 필요한 것만 최소한 제공해주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이른바 큐레이팅, 추천 서비스다. 데이터를 다룰 수 있는 힘이 있으려면 맥락을 읽는 힘이 있어야 한다. 메타데이터를 알아야 한다. 저 인간이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그리고 더 큰 흐름과 가치를 읽는 힘이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통찰이라고 한다. 음식맹이라는 말이 있다. 비슷하다. 정확하게 그게 어떤 의미고 어떤 방식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 공감되는 일화가 있다.
1957년 4월 1일, 영국 BBC방송은 역사에 남을 유명한 만우절 장난을 선보였다. 한 시사프로그램에서 당시 높이 평가받던 한 방송인이 평년보다 겨울이 따뜻해서 그해 스위스에서 스파게티 풍년이 들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굉장히 진지하게 보도했다. 산속에 자리한 과수원에서 농부들이 나무에서 스파게티를 따는 화면도 보여주었다. 시청자들 대부분은 이 보도가 사실이라고 믿었단다. 놀랍게도 그들은 스파게티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음식이 되는지 모르고 있었다. 50년이 지난 지금은 다를 수 있다. 오늘날 스파게티는 영국인이 애써 요리하는 몇 안되는 음식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오늘날 대부분의 영국 학생들은 그들이 먹는 음식의 재료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요리사 올리버는 종종 학생들에게 감자, 양파, 부추 등을 보여주며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보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마치 다른 행성의 생물을 보듯 당혹스럽게 쳐다보거나 토마토를 보고 감자라고 대답한단다.
우리는 대부분의 음식재료를 잘 알고 있다 믿는다. 모든 재료를 직접 보고 만지면 다룬 경험이 없더라도 어릴 적 그림책의 기억이든 뇌세포에 저장된 이미지의 형태든 일반 상식으로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걸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네팔의 수도가 카트만두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카트만두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있을까? 학급 친구 이름을 다 외운다고 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름을 안다고 해서 그 친구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을까?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알아야 한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세상이 지나온 과정, 즉 역사를 배운다.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알아야 한다.
우리 사회는 결과 중심이다. 스펙 중심. 결과를 보여주는 것, 끝내 건물주가 되는 것, 끝내 성공하는 것, 끝내 취업하는 것, 그런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런 결과를 이루기까지 스스로에게 가한 노력과 인내를 보상받으려는 마음은 공정함의 이름으로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한다. 지푸라기같은 시험과 스펙이 이 시대의 유일한 공정함이다. 결과 중심의 태도는 음식을 대하는 태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미디엄으로 익힌 스테이크를 애인과 함께 썰어 먹는 튼실한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이전의 보이지 않는 과정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난 송아지의 절망스런 삶은 정말 우리와 무관한 것인가? 택배 분류작업을 하는 노동자의 삶은 우리와 무관한 것인가? 직업계고를 졸업한 후 pc방에서 원망과 분노의 삶을 보내는 무기력한 20살 청년의 모습은 우리와 무관한 것인가? 위협받는 여성의 삶은 남성의 삶과 무관한 것인가? 우리는 정말 그들과 상관없는 것인가?
먹는 것은 관계를 맺는 일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 나와 세상과의 관계, 세상과 세상이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음식을 먹는 일은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일이다. 음식을 먹는 일은 알에서 깨어나 세상을 향해 일어서는 행위다. 음식을 먹는 일은 혼자에서 함께가 되는 일이다. 음식을 먹는 일은 삶과 죽음의 신비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음식을 먹는 일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음식을 먹는 일은 행복의 의미를 찾는 과정이다. 음식을 먹는 일은 내 삶의 꿈과 가치, 의미, 이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관계에 대한 이해가 이 모른 일련의 일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하지만, 거대자본은 이런 관계를 단절시켜왔다. 관계를 단절시키는 일이 가공과 대량생산의 일이다. 음식은 관계를 맺는 일에서 기호로 바뀌어왔다. 음식을 먹는 일은 공급자에게 이윤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일로 변했다. 음식을 먹는 일은 삶에서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다. 음식을 먹는 일은 뭔가를 하기 위한 일이 되었다. 자동차에 연료를 넣는 행위로 변했다. 그 연료의 연비가 어떤지에서 지금은 그 연료에 어떤 브랜드가 찍혀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그 외의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과정은 베일에 감춰지고 화려한 공연이라는 결과물에만 집착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자 의미가 되어 버린 탓이다.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들의 운명, 그들 탓이라는 생각은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온다. 그들 스스로 그들 삶에 절망하기 이전에 나처럼 노력했어야 한다는 능력지상주의를 설파하며 공정과 정의를 부르짓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약육강식적 공정함을 절대 가치로 여기는 사람과 온갖 관점과 논리로 채식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사람의 논리적 뿌리는 닮았다. 현재라는 결과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결과중심의 긍정성으로부터 미래를 말한다는 점이다. 반면에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은 현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결과를 개선함으로서 미래를 말한다. 부정과 긍정이 서로 연결되어야 세상이 창조된다. 디지털 세계는 0과 1로로 이루어진 이진법의 세계다. 반도체의 전류가 흐를 때와 흐르지 않을 때 두 가지 경우로 무한한 세상을 창조한다.
각자가 처한 현실을 구성하는 데이터가 어떤 정보를 담고 있더라도 부정과 긍정의 조합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공정과 정의라는 이름으로 부정과 긍정의 창조적 조합 가능성을 애초에 없애버리는 어리석음을 경계해야 한다. 공정과 정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소, 돼지, 닭의 삶을 생각하는 것처럼 창조적 접근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누가 왜 그들의 삶을 그렇게 만들었나? 누가 인간에게 동물을 함부로 대할 권리를 부여했는가? 인간 스스로 부여했는가? 신이 부여했는가? 이런 질문의 대한 지난한 대답 과정이 우리의 삶을 더 나은 지점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만약 인간만의 신이 있어 인간을 위해 동물을 희생하는 것이 정의롭다 말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동물에게 악마다. 강남 건물주만의 위한 신은 왠지 사이비처럼 느껴진다. 택배 노동자만의 신도 마찬가지다. 절망에 시달리며 고통받는 청년의 신과 대기업의 잘나가는 임원의 신은 같아야 한다. 고독사하는 노인의 신과 목이 쉬어라 기호를 외치는 국회의원 후보의 신은 같아야 한다.
무한의 반복으로 0과 1이 창조해내는 디지털 알고리즘의 세계와 포기하고 싶은 고단한 현실 속의 부정과 긍정이 창조해내는 오늘이라는 현실은 서로 닮았다. 한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부정과 긍정이 똑같이 필요하다. 하나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부정과 긍정의 조화로운 체계가 완성된 컴퓨터 언어의 완성물을 아름다운 알고리즘이라고 부른다. 내 삶과 세상의 허술한 알고리즘의 빈틈을 메우는 것이 삶의 의미이자 목적 아닐까? 나에게 ‘비건’이라는 단어는 알고리즘 보정 프로젝트다. 프로젝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삶도 일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맛에 사는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나니 이제야 아름다운 알고리즘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