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과 연관된 최초의 이유는 45년 전에 피어났다. 6살 어린 시절에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다. 마당에서 계절의 흐름과 생명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며 놀았다. 봄이 되면 마당 구석의 석류나무에서 싹이 났고, 가을이 되면 마른 잎이 떨어졌다. 철꼬챙이처럼 매말라 죽어버린 철쭉을 무심코 땅에 심었더니 기적처럼 싹이 텄고 몇 달 뒤 화려한 분홍꽃을 피워내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마당에서 놀 때 모험과 두려움 사이에서 아드레날린을 샘솟게 만드는 녀석이 있었다. 쥐였다. 간혹 쏜살같이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걸 보곤 했다. 어린 내게도 쥐는 애초에 나쁜 동물이었다. 갓난 아기가 쥐를 보면 방긋방긋 웃거나 호기심에 다가갈지 모른다. 하지만 해롭고 나쁜 동물이라는 어른들의 생각을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6살 아이에게 쥐는 악마였다. 잡아서 죽여야 하는 적이었다. 지금이야 믿기 힘들겠지만 1960년대 전후로 정부 주도의 쥐잡기 운동이 벌어졌다. 독이 든 쥐약이 섞인 음식을 먹고 집집마다 개 한 마리쯤 죽어가던 시절이었다. 사람과 가까이 서식하던 여우도 쥐약 때문에 멸종했다는 설이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어린 아이들에게 쥐를 잡아 죽이는 숙제를 내주었다. 그 증거로 쥐의 꼬리를 잘라 학교에 가져가 숙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쥐를 잡고 죽여서 꼬리를 자르는 것은 대부분 어른들의 몫이었겠지만, 간혹 용감한 아이들도 있었을 테다. 지금에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엽기적인 일이 그때는 시대의 상식이었다. 나는 학교에 쥐꼬리를 들고 가야 하는 세대는 아니었지만, 정부 주도의 쥐잡기 운동이 벌어질 무렵 마당에서 쥐와 홀로 전쟁을 했다. 미스테리와 서스펜스가 넘치는 나만의 모험이었다.
쥐는 어린 내가 감히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쥐를 잡고 싶었다. 쥐를 잡음으로써 나도 세상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달리기 시합에서 일등을 하고, 공부로 일등을 하고 서울대에 합격하고 대기업에 취업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 자기 효능감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비슷했다. 나는 쥐를 잡기 위해 머리를 굴리며 시행착오를 겪었다. 먹이로 유인하기도 하고, 허술한 덫을 놓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탁 펼쳐진 마당에서 여기저기 예상가능한 동선을 통제해야 한다. 쥐는 빠르기 때문이다. 쥐가 들어갈 통로를 가능한한 막는 일이 중요했다. 어린 아이가 넓은 마당에 간혹 나타나 생사를 걸고 도망치는 쥐를 잡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쥐는 목숨을 걸고 도망치지만 아이는 쥐 잡는데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계절이 몇 번이나 바뀌는 동안의 온갖 시도는 쥐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당 한구석에 놓인 빈 연탄 화로 속으로 아버지 신발 사이즈보다 훨씬 큰 쥐가 슬며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움직임을 보니 늙은 쥐가 분명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오크를 무찌르는 무기처럼 연탄집게를 단단히 쥐고 살금살금,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조용한 걸음으로 연탄 화로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연탄 화로 속으로 시선을 천천히 시선을 옮긴 다음 쥐를 발견하자마자 전광석화처럼 연탄집게를 쥐를 향해 찔러 넣었다.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만 그렇게 가까이서 그렇게 큰 소리가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는 처음 들었다. 연탄집게는 쥐의 몸통을 관통하지 못했다. 날이 두 개 있는 거대한 포크같은 연탄집게는 쥐의 몸통을 누르고 있었다. 연탄 집게 날의 반대편 끝 지점에는 6살 어린 아이가 체중을 실은 두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제우스의 번개처럼 체중이 실린 연탄집게에 몸통이 걸려 연탄 화로 밑바닥에서 꼼짝달싹 못하는 쥐의 눈동자를 보았다. 후추알 크기의 작은 눈동자는 내게 수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야생 포유류의 눈을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이고, 살고 싶어 절규하는 생명을 내 손으로 죽이는 것도 처음이었다. 6살 어린 아이에게는 너무나 혹독한 순간이었다. 잠시 멈칫 하는 사이 손의 힘이 풀려 누르고 있는 연탄 집게의 압력이 조금이라도 낮아지면 쥐가 도망갈 수 있었다. 어떻게 잡은 쥐인가? 나는 본능적으로 힘을 줘 연탄집게를 쥐를 향해 사정없이 밀어 넣었다. 몸의 물렁이는 감촉이 연탄집게를 타고 손으로 전해왔다. 내 몸처럼 따뜻하고 물렁하고 보드라운 느낌이었다. 더 이상 힘을 주어 차마 그 쥐를 죽일 수 없었다. 그 물렁한 느낌은 살아있는 것, 생명의 느낌이었다. 제발 살려 달라는, 이렇게는 죽기 싫다는, 인간을 증오하는,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애절한 눈빛이었다. 차마 쥐를 죽일 수 없었다. 5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갈등을 했는지 모른다. 쥐와 그런 상태로 대치하기 전까지는 나는 쥐를 용감하게 죽이는 전사였다. 하지만 금속성 연탄집게를 사이에 둔 70센티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나는 무너져버렸다. 베트남전에서 양민 학살을 하고 난 뒤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처럼 쥐를 죽이는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내 눈 앞의 작은 생명은 줄무늬만 없다뿐이지 귀여운 다람쥐의 눈과 몸을 가진 보호해줘야 할 생명 같았다. 실체를 대면하고 진실에 눈을 뜬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의 깨달음보다 오랜 세월 주입된 생각이 더 강했다. 나는 결국 이를 악물고 쥐를 죽였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나는 코끼리와 사자를 사냥하는 희열을 맛보기 위해 아프리카로 향하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관념은 드디어 쥐를 죽였으니 최고의 날이어야 한다고 속삭였지만, 끌어오르는 현실은 슬펐다. 그날은 먹구름이 잔뜩 낀 오후였다.
쥐를 사냥한 경험 때문일지 모른다. 얼마 뒤에 나는 변했다. 결과보다 과정을 생각하는 아이가 되었다. 쥐를 죽이고 몇 일 뒤 엄마는 쇠고기국을 끓여주셨다. 힘줄 섞인 질긴 고기 몇 점을 넣어 묽게 국을끓이고 무와 파를 송송 집어 넣고 고춧가루와 간장, 소금으로 간을 한 쇠고기국은 전쟁이 끝난 후 20년 넘게 최고의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고기를 많이 먹이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때 쇠고기국을 먹을 수 없었다. 시골에서 보았던 밤색 빛깔의 소와 갈색 쇠고기국의 빛깔이 닮아 있었다. 그때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물음이 떠올랐다. ‘이 쇠고기국은 살아있는 소를 죽여 만든 것 아닌가?’ 그때부터다. 나는 쇠고기국을 먹을 수 없었다. 시골에서 보았던 밤톨모양의 착한 소의 검은 눈망울이 자꾸만 떠올랐다.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라는 결과가 아니라, 음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귀한 쇠고기국을 먹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부모가 회사를 가야하고 어린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을 때는 어린이집이 유일한 대안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내게 쇠고기국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무조건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조금 먹는 것은 가능했지만 입에 대지 않는 것은 아무도 없는 집에 5살 어린아이가 홀로 집에 있겠다고 우기는 것과 같았다. 나는 억지로 참고 쇠고기국을 찔끔찔끔 먹었다. 그때 쇠고기국은 음식이 아니라, 죽은 동물일뿐이었다. 내 손으로 직접 죽인 쥐와 누군가가 대신 죽여 쇠고기국이라는 이름으로 밥상 위에 올라온 소가 오버랩되었다. 직접 대면하니 여리고 착해 보였던 후추알같은 쥐의 눈망울과 밤톨같은 소의 눈망울이 크기만 다를뿐 같았다. 둘 다 착한 검은 색이었다. 쥐사냥 이후에 어린 나의 세계는 혼란스러웠다. 거북하지만 해야 하는 것, 싫지만 해야 하는 것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고 나와 세상과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싫은 쇠고기국을 억지로 먹듯 학교를 다니기 싫지만 다녀야했고, 공부를 하기 싫지만 해야 했고, 직장을 다니기 싫지만 출근을 해야 하는 삶으로 이어졌다. 어떤 때는 도저히 못먹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억지로 참고 먹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에 대해 사람들은 ‘사회화’라는 말로 퉁쳐서 표현하곤 했다. 사회성이 부족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일보다 더 두려운 일이라고 어른들은 말했다. 어린 나는 납득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논리도 생각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냥 ‘싫다’라는 느낌으로만 다가왔다. 그 싫은 느낌의 실체는 사회의 한 부분을 공격하고 무너뜨려야 사회성을 인정받는 아이러니와 비슷했다. 쥐를 죽어야 구성원으로 인정받듯, 소를 죽어야 돈을 벌며 살 수 있듯, 소를 먹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듯, 왕따와 어울리지 않아야 무탈하게 학교를 다닐 수 있듯, 내 삶을 갈아넣어 공부와 일을 하듯 무언가를 희생해야 인정받는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이라 불리는 불확실한 실체와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6살 되는 해에 내 삶으로 훅 들어온 현실이라는 실체는 바로 ‘고기’였다. 내게 고기는 모순, 불합리, 연민, 용기, 초월, 성장, 공감과 부끄러움이었고, 살인마의 비정함과 휴머니스트의 따뜻한 마음이 뒤섞여 엉킬대로 엉켜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실타래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