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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책방 Jan 28. 2023

감성

난 사회부적응자다. 아주 어릴 때부터 왠지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의 입과 행동, 책으로부터 배웠던 세상은 이래야 하고, 인간은 이래야 한다는 것들과 실제 세상은 달랐기 때문이다.


세상은 몇 가지 유형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는 80억 명의 사람들은 세상이 정한 몇 가지 유형에 자신을 구겨 넣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여긴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을 몇 가지 유형의 틀 속에 집어 넣기 위해 학교를 다니고 직장을 다닌다.


예전 다니던 회사에서 했던 수많은 일들은 끝이 없었다. 단 하루도 일을 끝내고 퇴근한 적이 없었다. 질경이같은 생명처럼 끝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일들로부터 떠나 잠시 잠을 자러 가는 시간이 퇴근이었다.  언제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며 퇴근했다. 


마르지 않는 폭포처럼 끝맺음이 없는 일이었지만, 하나하나 마무리하는 성격의 일이 있었다. 바로 발령이다. 발령은 명령인데, HR에서 발령이란 구성원들의 상태를 전산 입력하는 일이다. 입사발령, 면수습발령, 부서 이동 발령, 진급 발령, 퇴직 발령 같은 것들이다.  한 명을 채용하면, 입사 발령, 부서배치 발령, 면수습발령 등의 몇 개의 기본 발령이 있다. 법정 자격증 소지자의 급여 반영 등을 포함하면 한 명당 입력해야 하는 기본 발령이 최소 5개 전후다. 1년에 1천명을 채용하면 입사자와 재직자를 아울러야 하는 발령업무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입사 발령은 입사자의 모든 인적 사항을 다 입력해야 하니 시간이 제법 걸린다. 나중에 발령전담인력이 생겼지만, 한 동안 내가 직접 발령을 넣었다. 그 중 퇴직 발령에는 사유를 기입하게 되어 있다. 퇴직 사유는 몇 가지 없었다. 전직, 진학, 건강, 업무부적응, 개인 사유 등 7개 정도의 발령 코드가 있었다.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나보다 2년 먼저 퇴직한 동기이자 룸메이트는 항상 내게 말했다. 자신이 퇴직하면 퇴직코드는 '업무 부적응'이라며, 자신의 직장 생활이 업무부적응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되는 것이 싫다 했다. 동기가 퇴직하고 난 뒤 난 동기의 일을 도맡았고, 나도 퇴직했다. 후배 중 누군가가 나의 퇴직 사유도 '업무부적응'이라고 입력했을 것이다. 건강 문제, 진학도, 전직도 아니었고, 말 못한 가정사나 개인 문제도 없었고, 다만 일이 즐겁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업무 부적응'이다.


지난 내 인생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사회부적응, 업무부적응이다. 부적응이라는 말은 부정적이고, 적응이라는 말은 긍정적이라 보지 않는다. 부적응과 적응 모두에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이 공존한다. 처한 환경과 주어진 대상에 적응하며 몰랐던 걸 배우는 적응력은 생명체의 필수 요건이지만, 무조건 적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컨대 일회용품만 사용하는 삶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일상의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 위해 일회용 삶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삶에 부적응해야 너와 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맞지 않은 신발처럼 자신과 맞지 않은 일인데, 꾹 참고 꾸역꾸역 일하는 것도 꼭 바람직하지는 않다. 끈기와 인내심은 삶에서 꼭 필요한 자질이지만, 대상과 조건에 따라 적절히 발휘해야 한다. 그 적절한 판단이 어렵다. 지난 일에 부적응했던 건 내가 지나치게 감성적 인간이었던 탓이거나, 그 일들이 지나치게 논리적 일이었던 탓 같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직업과 일을 감성적으로 이해하지 않을까?  HR은 규정, 논리, 형평성, 공정성, 객관성 같은 차가운 키워드가 지배하는 업무다. 많은 일들이 그렇다. 인간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요구되는 교사, 간호사, 의사 같은 직업들도 마찬가지다. 직업을 꿈꿀 때의 두근거리는 설렘과 뜨거운 열망이 사라진 직업인의 마음에는 돈, 규칙, 논리, 이기심과 같은 차가운 계산기가 자리 잡는다. 경제 활동의 엔진은 차가운 이성이 아니라, 따뜻한 감성에 가깝다. 소비의 주체는 따뜻한 감성적 인간인데, 생산의 주체는 왜 인간이길 포기하고 차가운 알고리즘이 되려 할까?


인간은 무언가가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된다 여기면 지갑을 열어 소비를 한다.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지속적인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행위 혹은 행위의 결과가 누군가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직업의 본질은 이타성인데, 누군가를 댓가 없이 도우려는 순수한 마음은 왜 비즈니스와 양립할 수 없는 멍청한 생각으로 여기는 걸까?


직업을 감성적으로 이해하면 과연 문제가 생길까? 공교육 교과서를 보아도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 차갑고 딱딱하고 재미가 없다. 내가 봐도 재미가 없는데 학생들은 오죽할까?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피로 사회, 위험 사회라면 그 이유 중 하나는 직업과 일을 논리로만 만들어진 코딩이나 디지털 신호처럼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인간은 다양한 감성이 파도처럼 멈추지 않고 출렁이는 존재다. 인간의 감성을 재해석하고, 직업과 일을 감성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면 덜 피곤하고 더 행복한 사회가 될까?  딴 건 몰라도 나처럼 업무부적응으로 퇴직하는 사람은 줄어들 것 같다. 최소한 퇴직 시기가 늦춰지거나 안성맞춤일 때에 퇴직하는 힘이 생길 듯 하다. 나를 직업의 틀에 짜맞추는 일방성에서 벗어나 직업을 나의 방식으로 다루는 힘이 길러질 듯 하다. 취업이든 창업이든 이것 역시 중요한 직무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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