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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옹책방 Mar 03. 2023


고3 때 담임이 생각난다. 한 친구가 무기화학과를 가고 싶다고 하니, "임마야... 현대는 평화의 시대다. 무기 같은 것 만들어서 뭐하려고 하냐? 무기는 필요 없는 시대다. 정신차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교사들이 학생들의 진로를 책임졌다.


이정모 전 국립과천과학관 관장은 고등학교 때 농업에 관심이 많았단다. 고3 담임이 생화학과를 추천했다고 한다. 꽃 花자로 생각한 담임은 생화학이 꽃과 식물에 대한 학문인줄 알았단다. 담임의 권유로 생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꽃과 식물이 아닌 단백질과 아미노산의 분해 과정에 대해 배웠고, 이를 계기로 과학에 푹 빠진 인생을 살게 되었단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일들이 많다. 잘 모르고서 뭔가를 했는데, 그게 삶의 중요한 계기가 되고, 직업이 되고, 운명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 일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이런 일들이 많을 것 같다.


삶을 단순히 인풋과 아웃풋 관점으로 보면, 뭔가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과 좋은 결과, 행복한 삶은 별 상관 관계가 없는 듯 하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그건 생각한대로만, 아는대로만, 계획한대로만 펼쳐지는 세상 아닐까? 예상치 않음이란 재미의 중요한 요소니까.


내가 원하는 걸 찾아,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이 펼쳐지도록 안간힘을 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것,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르게 펼쳐지는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훨씬 중요하다.


원하지 않는 상황을 통해 원하는 걸 찾고, 원하는 걸 실현시키는 역량이 인간의 운명을 가른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걸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으로 여기지 말고, 당연함으로 받아들여 실패를 즐길 수 있는 배짱을 길러주는 교육을 하면 좋겠다. "~~을 해야 한다"는 비장한 의무와 책임감을 강조하는 교육이 아니라, "~~을 함께 해보자!"는 놀이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교육이 되면 좋겠다. 공교육이 그런 역할을 하면 어른이 되어도 재미있는 일이 계속 펼쳐질 듯하다. 그런 교육을 받고, 그렇게 살면, 밥 먹으면 똥이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적성에 맞는 직업 같은 것은 저절로 찾지 않을까? 


아이에게 먹이지도 않고, 똥이 안 나온다고 걱정하는 교육은 이제 그만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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