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따스했다. 밤기차에서 내려 프라하 얀 후스 광장에 들어선 시간은 아침 7시쯤이었다. 1998년 9월이었다. 하루가 시작되기 전의 광장은 텅 비어 있었고, 광장 한 켠에 뒷뚜껑이 열린 청소차가 서 있었다. 청소부 2명은 밤새 버려진 광장의 쓰레기를 바쁘게 청소차에 싣고 있었다. 동행이 있었다. 기차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왜소한 몸짓의 22살 미국 청년이었다. 그도 나처럼 배낭여행중이었다. 헝가리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여행했다. 여행자들로 붐비는 프라하 여행의 시작과 끝인 얀후스 광장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다. 이른 출근을 하는 체코인이 광장 언저리로 이따금 걸어갈뿐이었다. 텅빈 광장에 미국 친구와 나는 오래동안 나란히 앉아 광장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미국 친구가 더 이상 못참겠다는 듯 말했다.
“배고프다. 먹을 것 파는 곳이 있는지 찾아 보고 올게.”
30분쯤 뒤 미국 친구가 봉지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기쁜 얼굴로 햄버거 파는 가게가 있어 사왔다고 했다. 나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봉지 속으로 들어가는 그의 손을 바라봤다. 그의 손은 음료수를 먼저 하나 꺼냈다. 다시 봉지 속으로 들어간 손은 햄버거 하나를 꺼냈다. 끝이었다. 이제 빈봉지였다. 내 것은 없었다. 당황했다. 음식 사오기를 애타게 기다린 배고픈 동행자 옆에서 미국 친구는 자랑스럽고 게걸스럽게 햄버거와 음료수를 먹고 마셨다. 나는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관찰했다. 배가 더 고파왔다. 배고픔보다 당혹감 때문에 힘들었다.내가 먹을 걸 사러 갔다면 친구의 것도 당연히 사왔을 것이다. 그게 인간이라 여기는 것이 한국 정서 아닌가? 이 놈은 인간도 아니었다. 인간이길 포기한 인간과 더 이상 함께 있기 싫었다. 음식을 다 먹고 트럼을 할 즈음에 나는 그와 헤어졌다.
4개월의 첫 배낭 여행이 끝날 무렵, 미국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미국인이 똑같진 않겠지만, 개인주의 문화가 상식인 미국 문화에서는 당연한 행동일 수 있다. 만약 그때 내가 그에게 “어떻게 딱 너 먹을 것만 사올 수 있어? 너무한 것 아냐?”라고 말했다면 그는 “너도 아침 밥을 먹고 싶었다면 내가 사러 갈때 돈을 내게 주며 너 먹을 것도 사오라고 했어야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니까.
여행의 본질은 다름이다. 나와 다른 것들과 만나는 일이 여행이다. 내가 사는 곳과 다른 곳,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과 만나는 경험이 여행이다. 그런 점에서 얀후스 아침 광장 에피소드는 진정한 여행 이야기다. 프라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김없이 햄버거 사건이 떠오른다. 얀 후스 광장에서 벌어진 얽힌 배고픔과 당혹감에 대한 추억이다. 후스라는 말을 들으면 또 한 사람이 떠오른다. 타이완 역사상 가장 성대했던 장례식을 치뤄줬다는 후스.
후스는 1935년 홍콩대학 법학박사를 시작으로 1959년 하와이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때까지 총 35개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중 미국이 31개로 가장 많았다. 자유주의자 후스는 근현대사를 통틀어 중국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상가이며 학자였다. 전집 44권을 남겼고, 문학, 역사, 철학과 종교, 고전 주석, 과학, 교육, 언어 등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었지만 요체는 용인이었다. 후스는 이렇게 말했다.
“용인은 모든 자유의 근본이다. 용인이 결핍된 사회는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다.”
(중국인 이야기, 김명호)
너그럽게 받아들이며 인정하는 태도를 뜻하는 용인. 용인은 자유의 근본이자, 여행의 근본이기도 하다.
용인하지 못하는 자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고,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는 몰락한다.
언제나 그랬지만, 너무나 쉽게 잊는다.
나의 사춘기,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힘들었다. 입시 지상주의 교육 속에서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교실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자유로운 의사표현이 실종된 교실, 토의토론이 실종된 강압적 교실에서 가끔 미래를 상상했다.
‘20년, 30년쯤 뒤의 교육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를거야. 당연히..’
세월은 흘렀고 한국 교육, 한국 사회는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더 안 좋은 쪽으로.
용인이라는 관점에서 그렇다.
정해진 진로에서 벗어나는 삶은 경멸, 혐오, 비난의 대상이 된다.
타인으로 받는 조롱과 멸시가 아니라, 스스로 멸시한다.
좋은 대학, 좋은 직업, 돈, 자기개발의 서사에 속하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다.
그 숨막히는 사회적 요구에서 벗어나도 예전에는 많은 것이 용인되고 많은 기회들이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자살률이 높아진 것과도 유관할 거다.
다양성은 시대 정신이라지만, 말뿐이다.
수많은 생각과 행동들이 다양성이라는 이름의 마감재로 화려하게 장식되지만,
공부, 대학, 직업, 돈과 직결되지 않는 다양성은 멸종한 지 오래다.
학생, 청년, 중년, 노년의 삶은 그래도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찾고 고민하지만,
돌고 돌아 돈이다.
돈은 삶의 동의어다.
다양성의 이름을 입힌 똑같은 삶이다.
용인의 전제는 다름이다. 제각기 다름이 다양성이다.
용인되지 않는 사회는 다양성이 멸종한 사회다.
의사가 되지 않아도 의사처럼 살 수 있는 사회가 용인이 구현된 사회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가치를 구현하면 각자의 인정과 각자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용인된 사회다.
전교 일등을 하고 서울대를 가고 의사가 되지 않아도 그 못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용인된 사회다.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아이는 부모에게 물어본다.
“오늘 저 뭐 해요?”
아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짓지 못하게 막는 것이 상식이 된 사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유의지를 박탈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회.
대학 성적 이의 제기를 부모가 하는 사회.
자녀 회사 생활의 문제를 부모가 직장 상사에게 제기하는 사회.
내 삶이 이렇게 된 걸 타인 때문이라면 복수의 칼을 가는 사회.
타인을 용인하지 않고 자신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80년대 고등학생들은 사회에서 대체로 어른 대접을 받았다.
어른의 존재로 용인된 것이다.
그런 용인 속에서 자유 의지가 싹트고 자랐다.
아무리 형식적 민주주의가 고도화 되어도 구성원들의 자유 의지가 없는 사회는 전제군주제 독재국가나 다름없다.
후스가 고민한 자유와 용인은 이런 상관 관계 아니었을까.
아이는 부모의 허락 없이 동네 산책도 할 수 없는 사회.
학생은 명문대 좋은 학과 아니면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사회.
큰 돈을 벌지 못하면 벌레 취급하는 사회.
자신보다 못하다 여기는 사람이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사는 걸 용인하지 못하는 사회.
그것이 이 사회가 말하는 공정이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조건과 결과라는 인과관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 무엇도 용인되지 않는 사회.
우리에게 필요한 용인은 혼자 햄버그를 먹는 동행자를 이해하는 것 이상이다.
어쩌면 근본부터 바뀌어야 할 지 모른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 번영하는 사회를 위해서 우리를 송두리째 바꿔야 할 지도 모른다.
그 중심에,
무엇을 용인하고 무엇을 용인하지 않을까가 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용인하거나 용인하지 않음의 목적을 아는 것일 게다.
왜 살며, 어떤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
나쁜 것은 너무 많이 용인하고,
좋은 것은 너무 많이 용인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 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