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는 크기에 최적화된다. 신용카드보다 작은 크기의 벌새는 1초에 90번 가까이 날개짓을 한다. 날개를 펼쳤을 때 3미터까지 되는 독수리는 1초에 겨우 한 번 날개짓을 한다.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 몸이 커질수록 속도가 느리고, 몸이 작을수록 속도가 빠르다. 최홍만이 이소룡처럼 전광석화의 공격을 하지 못하는 이유 같다.
AI라는 불리는 거인이 나타났다. 이 거인의 무서운 점은 속도다. 전지전능의 거인은 빛의 속도로 일한다. AI의 유용성은 속도에 있다. ChatGPT가 대답 하나를 하는데 10개월씩 걸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탁월한 결과물을 낸다 해도 성질 급한 평범한 호모 사피엔스로부터 외면받을 거다.
AI 등장 이후 다들 질문이 중요하다 말한다. 질문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한심한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좋다. 질문하는 순간에는 한심한 질문이란 없다. 모든 질문은 그 순간 자신에게 절박하다. 절박함은 때때로 가짜 질문을 양산한다. 질문의 목적은 알기 위함이다. 가짜 질문은 알기 위한 물음이 아니라, 자기증명을 위한 물음이다. 질문을 통한 자기 증명이란 엉성한 앎으로 만들어진 성체를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한 질문이다. 진정한 질문, 진실된 질문은 자기파괴적이다. 질문과 대답을 통해 자아가 해체되어야 진정한 앎에 다다른다. 진정한 앎은 자기증명의 대척점에 있다.
가짜 질문은 듣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말하기 위한 질문이다. 자신의 목소리에 더 큰 힘을 싣기 위해 프롬프트에 형성되는 질문은 거짓 질문이다. 인정받기 위해, 존중받기 위해, 자기증명의 목적을 지닌 질문은 가짜 질문이다. 질문의 탈을 쓴 주장, 질문의 형식을 빈 자기선언이다. 선언의 목적은 명료하다. “세상 사람들이여 나를 따르라”다. 팔로워와 구독자로 대변되는 사회적 영향력이다. 중요한 것은 영향력이 아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초라하든 거대하든 내가 가진 영향력을 어떻게 쓸까의 문제다. 질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어야 하다.
영향력은 대상과 내용의 문제다.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의 문제다. 모든 존재는 타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벌새보다 작고, 날지 못하는 손톱만한 바퀴벌레 한 마리도 우리에게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심장이 쿵한다. 지하철 맞은편에 앉은 낯선 사람도 내게 영향을 미친다. 생각에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영향력이 벌새의 몸처럼 작은가, 브라키오사우루스처럼 큰가의 문제일뿐이다. 그렇게 나도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모두 영향을주고받으며 존재한다. 존재는 곧 영향력이다. 내가 가진 영향력의 크기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나의 영향력을 키우기 노력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영향력을 발휘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 그것이 삶의 속도를 높이는 방법이다. 삶은 준비와 실행에 관한 문제다. 준비하는데에만, 거짓 실행에만 삶을 맡길 순 없다. 준비하며 실행을, 실행하며 준비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질문을 통해서다. 벌새가 독수리의 몸을 가지기 위한 질문, 독수리가 벌새 날개의 속도를 갖추기 위한 질문은 좋은 질문이 아니다. 어리석은 자기증명의 질문이다. 벌새가 독수리처럼 몸을 불리기에는, 독수리가 벌새의 빠른 날개짓을 터득하기에는 삶이 너무나 짧다. 인간이 ChatGPT의 속도를 이기는 방법은 질문이다. 무지에 기반한 진실된 질문을 해야 한다. 맹목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한 질문, 자기확장을 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내가 지닌 실날같은 영향력이라도 어떻게 쓸까?”라는 질문을 향해야 한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흐르듯, 모든 질문이 만나는 자신만의 궁극적 질문을 지녀야 한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 비즈니스적으로 말하면, “누구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역설적이게도 도움을 많이 줄수록 영향력이 커진다.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타인을 많이 돕고 있다는 뜻이다. 모든 영향력은 결국 도움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신을 돕는가? 타인을 돕는가의 문제로 나뉠뿐. 그래서 삶의 문제는 도움의 문제다. 어떤 인간도 도움의 주고받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도 마찬가지다. 가장 극적인 도움은 타자에게 먹힘으로써 도움을 주는 것이다. 먹히지도 않고, 잡아 먹지도 않으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법을 알아가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삶이다. 돈은 목적이 아니다. 돈은 결과다. 도움의 상호작용이 목적이고, 돈은 도움에 따른 결과다. 도움의 다른 말은 가치다. 돈의 획득을, 조직의 안정과 발전을, 자기증명과 인정은 결코 목적이 아니다.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결고 이루지 못하고 삶이 고달프다. 단순한 인과관계 오류다. 그물을 던져야 물고기를 잡는다. 물고기를 주지 않고 돈만 받으려 한다. 도움이라는 가치를 제공해야 돈이든, 인정이든, 증명이든 결과에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삶의 문제는 도움의 문제다. 삶의 목적은 도움이다. 삶이란 구현된 목적의 필연적 결과다. 도움의 문제는 흐르고 흐른 질문의 종착역, 바다다. 교육 또한 ‘누구를 어떻게 도울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질문과 대답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도움의 문제를 서랍장 깊숙히 넣고 열어보지 않는다. 삶의 끝자락으로 미룬다.
질문에 시대에 필요한 능력은 질문을 구분하는 힘이다. 의미 있는 질문과 그렇지 않은 질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있고 없음은 ‘도움‘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힘을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 그런 도움의 사유를 하는 사람들이 기획을 하고 실행을 하고 개선해 나가야 한다. 교육도 채용도, 삶도 일도 도움의 관점에서 업그레이드 되면 좋겠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나부터다. 생각을 증명하는 과정은 자기증명이 되어선 안 되겠다. 누구의 무엇을 도울 것인가라는 질문이 처음과 끝이 되어야 한다. 도움의 구체적 구현 과정에서 나 역시 도움을 받고 싶다. 의미는 믿음의 문제니, 믿고 질문하자. 몰라야 알게 된다는 믿음과 도와야 성취한다고 믿자. 이 믿음으로 묻고 대답하며 살자.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든, 개미의 발걸음으로 엉금엉금 기든 중요치 않다. 숨 속에 어떤 목적이 담겼는지가 중요할뿐. 목적이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