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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링스 Sep 22. 2019

불쌍한 엄마. 더 불쌍한 아들

아이 킬드 마이 마더|2009|자비에 돌란

자비에 돌란이 연기한 후베르트는 불안하고 매우 거칠지만 금방이라도 깨질듯 하다. 엄마가 죽도록 밉지만 그의 애착은 엄마로 향한다. 벗어날 수 없기에 더 밀어낸다. 그는 자신의 부모의 부모역할을 부정하고 피해의식으로 가득 찼다.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래서 게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무책임한 부모의 길은 없으니까. 물론 엄마도 불쌍하다. 엄마의 엄마는 우울증이고, 결혼한 남편응 일만하며 아빠로서 역할하지 않는다. 가장으로서 또 엄마로서 모두 버텨내기엔 지친다. 그렇다고 아들에게 무책임한 것에 대해 잘못을 피할 순 없다. 부모는, 특히 아빠는 엄마가 싫어서 이혼했다. 하지만 후베르트는 엄마가 싫어도 이혼할 수고 없고 저 사람은 평생 내 엄마다. 죽이고 싶어도 마음에서만 죽이지 죽일 수 없는 하나 밖에 없는 엄마다. 더군다나 너무나 낡고 여리던 어린 날에 전부와도 같던, 지워지지 않는 기억 속의 엄마다.


남친이 있어도, 위로해주는 선생님이 있어도, 엄마가 있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혼잣말만 되뇌는 후베르트. 그 혼잣말을 누구라도 봤으면 하는 마음인디 글도 쓰고 독백을 녹화하기도 한다. 그걸 결국 엄마는 보고 둘은 다시 한 걸음 다가간다. 이 부분에서 굳이 엄마가 아들의 독백을 보지 않길 바랐지만, 보게 만든 연출도 20대 초반의 데뷔작의 거친고 여린 감독의 일부분 같다.



예전 SBS 무언가족이라는 다큐에서 독립운동자의 아들인 국가유공자 아버지와 신발 수집 매니아 디자이너 아들이 나온 적이 있다. 자식의 신발수집과 직업이 탐탁지 않았던 아버지는 괜히 잔소리만 하게 되고, 아들은 현시대는 모르고 과거(부모)의 영광만 바라보며 자기를 못마땅하게 하는 아버지를 마음에서부터 차단했다. 같은 집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 소리를 지를 뿐. 그러다 방송의 도움으로 심리치료를 받는데, 아들은 눈을 감고 전문가의 손을 잡은 채, 전문가가 하는 말을 따라하게 된다. 전문가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대변해 말한다. ‘아들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여기서 아들은 못하겠다고 뿌리치지만 치료는 계속된다. ‘너를 사랑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나는 부모가 없이 자라서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아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내가 사랑하는 법을 모르지만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걸 배워서 널 더 사랑할게.’


게이가 아니였다면 더 마음은 열렸을까? 프랑스조차 그러한데, 우리 나라엔더 많은 슬픔이 숨죽여 숨어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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