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그래, 진정해 피과장"
서두에 말해두자면 이 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말을 제대로만 할 수 있다면 꽤 전달력이 있고 분위기를 내 중심으로 이끌어 갈 수 있다. 어떤 면에선 리더십의 표현이자 열정과 의지의 표현이다. 하지만 사실은 회피용 대사이기도 하다.
대사는 주로 보고 상황에서 등장한다. 특히 정책이나 개발 등의 이슈가 나올 때다. 대부분의 이슈는 일정의 이슈로 귀결되니까, 결국... 일정이 늦춰지는 상황에서 등장하는 대사다.
직장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가 일정이 늦춰지는 것에 대한 보고다. 특히 개발과 관련된 문제는 임원들이 쉽사리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듣다가 짜증을 내기 일 수다. 그리고 정말 듣기 싫은 필살기가 임원 입에서 나오는 순간, 멍해진다. "피과장, 모르겠고 일정 맞춰"
이 대사에 논리적으로 접근하기는 매우 어렵다. 말했듯 상황을 들을 마음가짐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해는 한다. 임원들의 머릿속은 내가 생각하는 것의 10배, 20배의 아젠다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던 1/10, 1/20 비중의 과제가 뭔가 안된다는 얘기를 듣게되면 짜증부터 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때 상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늘어놓으면 필패다.
일단은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하지만 내 무능을 보이면서 기죽은 채 물러나서는 안된다. '쟤는 늘 저래' 라는 생각이 깃들어 버리면 회사생활이 정말 망한다. 이렇게 물러날 때 듣게 되는 최악의 말은 "피과장, 이거 나만 성공하고 싶은거야?" 또는 "피과장, 이거 내 프로젝트야?" 류의 말이다.
그래서 결국 저 말을 뒤집어야 한다. "이거 내 프로젝트다. 일정이 미뤄져서 가장 힘든 건 바로 나다."를 먼저 선수쳐야 한다. 임원이 짜증나는 이 상황에서 내가 가장 큰 피해자는 담당자임을 명확하게 인지시키고, 그래서 오히려 임원이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 격려를 해줄 수 있게 반전을 꾀해야 한다.
실제로 나는 이런 말을 여러 번 하면서 상황을 임원의 감정이 아니라, 나의 감정에 집중하도록 전환시켰다. 물론 어느 정도 실장님께 농담도 하고 강하게 말 할 수 있게 된 상황이긴 했다.
"실장님, 화나시는 게 당연한데, 잠깐만 말씀드리면 저도 지금 개발 쪽에서 이렇게 될 줄 몰랐고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미리 캐치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일 힘든 건 사실 저잖아요. 실장님은 영업팀 실적 잘 나오면 그래도 괜찮지만 저 이거 안되면 올해 망해요ㅠ, 어떻게든 해결해보고 다시 검토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빠져나왔다. 평소에 워낙 신뢰가 없는 사이라면 건방지다고 가중치 역공을 받겠지만, 보통 수준의 평판이 있다면 진실된 이런 표현은 상대방을 잠시 당황스럽게 하겠지만 그 마음이 꽤나 잘 전달된다. 실제로도 "그래, 젤 힘든 건 너지. 잘 해결해봐. 안팀장, 잘 도와줘" 이렇게 답변을 받고 일정 연기에 대한 보고 순간을 넘긴 적이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격정적인 표현이기도 하고, 흐름을 끊고 치고 나가야 하기 때문에 실천하기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시간차를 가지고 전달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차 전달이기 때문에 일단은 혼나는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다시 문제를 해결해 온 상황의 보고에서나, 아니면 메일로 정리된 내용을 전달할 때나, 아니면 조금 지난 회식이나 가벼운 대화 시간에 이 메시지를 전달해볼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저한테 정말 중요한 거라서, 저도 꼭 잘해결하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길 가장 많이 바라는 사람은 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혼내지 마세요, 안그래도 힘든데)"
잘 전달만 되면 힘든 상황에서도 이 난국을 해쳐나가려고 하는구나, 라는 불굴의 의지와 생존력까지 인정받게 될 수도 있으니 이 포인트를 기억하고 꼭 전달하면서 마이너스 평판을 플러스로 바꿔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