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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통증을 기록하는 이유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아서

by 물고기

서른셋 어느 날 이후, 나는 갑자기 이전처럼은 살 수 없게 되었다. 이전 해 여름 오른쪽 뒷목의 한 지점에서 시작됐던 통증이 어느새 온몸으로 걷잡을 수 없게 퍼졌고,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아졌다. 수많은 검사 끝에 내가 받아 든 진단명은 섬유근육통이었다. 버티며 직장에 나가기도 하고, 휴직을 하기도 하며 2년 반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내가 보낸 통증의 시간들에 대해 글을 쓰고 싶어 졌다.


이 글을 왜 써야 할지를 두고 수 십 번을 망설였다. 내가 느끼는 것을 어떤 적확한 말로 표현해야 좋을지 몰라 글자를 지우고 또 지우길 반복했다. 이 글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지, 누군가에게 도움은 될지, 과연 나에게는 더 나은 일일지도 한참을 고민했다. 통증의 기억을 복기해내는 것이 나에겐 당연히 괴로운 일일 것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글을 읽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소리에 귀를 막아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가장 가까이에서 나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글을 쓰라고, 지금 당장 자리에 앉아 마음속에 담긴 이야기를 모두 뱉어내라고. 나는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내 시간에 의미를 찾아주고 싶다.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없다고 했다. 나는 나의 노력, 눈물과 삶에 대한 분투로 가득한 3년 여의 시간이 ‘아팠다’는 말로 아무 의미도 갖지 못 한 채 희미해지는 것이 싫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여성의 삶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글을 보며 여성이라는 단어가 자꾸 ‘질병’으로 치환되어 읽혔다. 질병의 시간이 기록되지 않으면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다. 아무 의미도 갖지 못 한 채.


나의 어머니는 내가 몇 년째 ‘부재중’이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했다.


하지만 엄마, 난 어디에도 가지 않았어.


나 여기 있다고, 여기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투쟁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건강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의 그 시간들이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간 것은 아니라고. 내가 하루에 단 10분을 산책하는 날도, 혹은 아예 바깥에 나가지 못하는 날도 나는 더 나아지기 위한 마음을 단 한 순간도 놓은 적이 없다고.


나의 시간은 아팠다는 말 하나로 성에가 낀 유리창처럼 뿌옇게 희미해졌다.

주변인들에게 희미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희미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더 괴로웠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져 버린다. 나는 기록을 남겨야만 했다. 내가 그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내가 내 삶에 얼마나 큰 애착을 가지고 노력해왔는지에 대한 증거를 남겨야만 했다.

기록되지 않은 서사는 보통 납작해진다. 아픈 사람은 말 그대로 아픔과 싸우느라 기록을 남길 에너지가 부족하고, 그저 타인의 안타까움이나 동정이 담긴 몇 마디의 언어만이 스쳐 지나가므로 질병의 시간은 보통 납작하게 남는다.


그렇게 나 또한 통증의 기록을 남기는 것에 여러 번 실패했다. 수차례 노트북을 열었으나 고정된 자세가 유발하는 근육의 경직감과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 길어야 삼십 여분쯤 버티고 글쓰기를 중단하기 일쑤였다. 글씨를 쓰면 팔과 어깨와 등이 아팠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자세는 없었다. 아니, 사실 통증이 시작된 이후 나는 단 하루도 통증과 함께이지 않는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다들 나에게 어디가 아픈 것이냐 물었다. 언제쯤 나아지는지, 다시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복직을 하면 그땐 괜찮을 수 있는 것인지 물었다.

그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은 나도 가장 알고 싶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잠시 그들을 스치거나, 차를 마시거나, 잠깐의 전화 통화만을 해서는 안 되었다.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글을 쓰기로 했다. 나의 시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쓰자, 나도 잘 모르겠으니, 그러니 나와 당신에게 설명하기 위해 글을 쓰자고 생각했다.

내가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게.


은유 작가는 《쓰기의 말들》에서 ‘써야 알고 알아야 나아지고 나아지면 좋아지고 좋아지면 안심한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문장을 여러 번 베껴 적으며 이렇게 글을 써서 종국에 내가 안심할 수 있게 된다면 글을 몇 백 번이고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모른다. 명확히 기록되지 않은 시간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나는 기억의 희미함이 내 존재의 희미해짐을 의미하는 것 같아 점점 불안해진다. 나는 내가 지난 3년 간 어떤 시간을 지나왔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잘 모르기에 글을 쓴다. 통증이 내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수없이 고민하고, 수많은 날들을 함께 했지만 도저히 알 수가 없어서 이렇게 글을 쓴다. 그것이 하려는 말을 나는 알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나아져서 종국에 안심하고야 말 것이다.


나를 위해 쓴다. 내가 읽고, 내가 나의 마음을 알기 위해 쓴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를, 나의 통증을, 그리고 통증의 시간들을 이해하고 싶다.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은 통증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통증과 무관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모두 다 통증 환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섬유근육통 환자가 될 수도 있다. 아직 발병 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증 수치, 통증을 표현하는 단어, 진단명 같은 객관적 지표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통증 환자에게는 너무나도 많이 존재한다. 아서 프랭크는《아픈 몸을 살다》에서 의학의 한계를 이해하기 위해 질환과 질병의 차이를 인식해야 함을 역설했다.

의사들이 하는 말은 질환 disease, 즉 고장 난 부분에 초점을 두지, 고장이라는 사건을 몸소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 전체를 염두에 두지는 않는다. … 의학의 이야기는 질환 용어를 사용한다. 질환 용어는 측정된 값을 참조하기 때문에 ‘객관적’이다.

질병 illness은 질환을 앓으면서 살아가는 경험이다. 질환 disease 이야기가 몸을 측정한다면, 질병 이야기는 고장 나고 있는 몸 안에서 느끼는 공포와 절망을 말한다.

그의 정의에 따르자면 나는 질병 illness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통증 수치 5 정도로 경직감과 뻣뻣함이 주로 있고 염증 수치가 없으며 경추 디스크 탈출증이 없다는 객관적 증상 서술이 아닌, 통증과 함께 한 나의 생활, 대인 관계, 직장 생활, 감정 등 측정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해 서술하고 싶다. 그것이 바로 아픈 몸을 사는 것이며 내가 하고자 하는 통증을 구체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직 나만을 위해서 글을 쓸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혼자 보는 벽장 속 일기장이 아니고서야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것이 없는 채로 내 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다. 앞서 인용한 책 《아픈 몸을 살다》를 저술한 작가 아서 프랭크는 서른아홉에 심장마비를, 마흔에 암을 경험했는데 그가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아래와 같이 적었다.


이 책은 특히 어떤 편지 한 통 때문에 시작됐다. 내 사촌 하나가 폐암을 앓던 자기 친구에게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암처럼 개인적인 일을 이야기하는 편지를 쓰기란 쉽지 않지만, ‘내가 아팠을 때 그런 편지를 받았더라면’ 하고 생각해봤다. 크게 아팠던 적이 있는 사람이 편지를 보내 자신의 질병 경험을 나누고 내 경험에 기꺼이 연결되고자 했다면 정말 뜻깊었을 것이다.

손으로 편지를 만지듯이, 접고 또 접어서 답장을 보내듯이, 내가 쓰는 이글에 다른 사람들의 손길이 닿길 바란다. 아픈 사람들이 이 글에 응답하길 바란다. 여기서 응답이란 다른 이가 쓴 이야기 안에서 자신의 경험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아프기 시작한 이후 내내, 글을 찾아 헤맸다.

병원 블로그나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글이 아닌 실제 통증환자, 섬유근육통 환자의 글을 찾아 인터넷이 닿는 곳곳을 헤맸다. 물론 네이버에 있는 여러 통증 환우회에도 가입해 많은 글들을 읽었지만, 그것으론 충분치 않았다. 병원이나 약, 증상 등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 말고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나 《숨결이 바람 될 때》처럼 온전히 책 한 권의 투병기를 읽고 싶었다.

이 길을 갔던 사람들이 분명 적지 않다고 하는데, 책으로는 단 한 권도 남아있지 않았다. 왜였을까. 이유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통증 환자들의 남은 에너지는 일상을 겨우 지탱하는 데 쓰여야 한다. 에너지가 있다면 그것을 꼭 필요한 일을 하는 데 써야 하지 앉아서 길게 글을 쓸 여유가 없다. 이 통증은 너무 지독히도 일상적이고, 그렇기에 이에 대한 글을 쓸 틈을 내기가 어렵다. 그럴수록 통증 환자의 목소리는 세상에서 희미해지고 지워진다. 잔인한 일이다.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거의 모든 투병기는 극적인 호전이나 여지가 없는 결말, 죽음으로 수렴했다. 무엇이 됐든 끝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와 동시에 왜 나와 같은 사례를 책 속에서 찾을 수 없는지 말하지 않아도 너무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낫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이런 불치성/난치성 만성질환은, 서사로서 매력이 전혀 없었다. 극적이지도 않고, 끝도 없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이 글을 써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국내에선 단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던 만성 통증, 섬유근육통 환자의 글이 비슷한 증상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 ‘The FibroManual’의 저자 Ginevra Liptan은 섬유근육통 환자였다.


‘왜 항상 통증이 있는 거죠?’
‘모르겠네요. 하지만 염증은 없어요.’


그녀가 피검사 후 류마티스내과 전문의와 하는 대화를 읽으며 나는 대학병원 진료실에 앉아 있었던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와 연결된 것이다.


I suddenly went from being a healthy and active medical student to barely functional, exhausted, and in pain all the time.
나는 갑자기 건강하고 활동적이었던 의대생에서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치고, 항상 통증이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 한 문장은 불과 몇 년 전까지 기타를 들고 공연을 하러 다니고,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데드리프트였던 예전 나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그때의 나와 아프게 된 이후의 나와의 간극이 너무 커서 예전의 모습도, 현재의 모습도, 어느 하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That summer, I was achy all the time. I took a part-time babysitting job, and working for just a few hours left me exhausted for days. I woke up in the morning with a sore neck and back, which hurt all day. I frequently fell stiff, weak, and lightheaded. I was as if all the energy of my body and mind had been sucked out. I went to see my primary care doctor, who prescribed a muscle relaxant, which did not help. the pain progressed to my upper back-an ache between my shoulder blades that would not go away. My spine hurt, my skin hurt, everything hurt.


겨우 몇 시간을 일하고도 며칠간 탈진한 상태가 되는 것, 목과 등에 통증이 있는 채로 잠에서 깨는 것, 몸의 에너지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느껴지는 것. 진통제를 먹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독감 주사를 맞은 후의 몸살을 항상 느끼는 것. 그녀의 글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기분이었다.



통증의 정도와 부위를 기록하는 통증 일지는 거의 날마다 썼다. 일기나 글은, 날마다 쓰지는 못 했지만 쓰고 싶을 때는 꼭 썼다. 아무리 힘들어도 쓰고 싶을 땐 상황이 어떠하건 써야만 했다.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Ginevra Liptan의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듯 이 글이 당신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쓸 글 속에서 당신의 경험을 발견하고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아직도 섬유근육통이 실재하지 않는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의사들이 존재한다. 병원과 병원을 오가며 많이 다치고 외로웠을 쓸쓸한 당신의 마음을 내가 정말 잘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어딘가에 있을 나와 비슷한 당신들에게 손을 내민다. 더 이상 외로워하지 말라고.

비슷한 마음을 찾기 위해 서점을 서성이다 결국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당신에게 이 글이 힘이 되기를.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비슷한 마음을 찾아 나서는 것이니까.

나와 당신을 위해 이 글을 쓴다.

부디 이 여정 끝에 우리 모두가 덜 아프기를.


2020. 4. 16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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