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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 Oct 27. 2021

조금 더 멀리 가자

계속

분명 힘들었다.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십 분을 더 기다릴 때 앉은 자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병원을 나와 약국에 가서 약을 받았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집으로 가는 방향인데 나는 별안간 왼쪽으로 틀었다. 상큼한 과일주스를 먹고 싶은 기분이었다. 내가 아는 주스 가게는 모퉁이를 돌면 바로 있으니 그 정도의 체력소모는 모험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10월이라기엔 쌀쌀했지만 따뜻한 겨울옷을 입었고 열 두시라 햇빛이 따가웠다. 날이 좋았다. 그 모퉁이 하나 돌면서 괜스레 신이 나서 마음속으로 노래를 불러 보게 되는 날씨였다. 그렇게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이 길을 걸을 때면 자주 들렀기에 나는 단골이라고 자부하는 그 주스 가게에 갔더니 너무 대문짝만 하게 ‘임대’라고 적혀 있었다. 유리 사방을 다 막는 커다란 노란 현수막이 폐업을 알리고 있었다. 잠시 망연자실했지만 나는 계속 더 걸어보기로 결정했다. 처음에 생각했던 곳이 없어서 아쉬웠지만 뒤로 가면 다른 선택지는 아예 없으니까. 잘 알 수는 없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을 앞으로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나의 체력 챌린지가 시작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백신만 맞고 집에 가서 쉬는 것이었는데 나는 집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고 굳이 상큼한 게 마시고 싶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도전을 외치는 거다. 도전! 나의 체력엔 자신이 없지만 오늘은 한 번 해보겠어. 그렇게 앞으로 몇 미터를 더 갔다. 그리고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상큼한 과일주스를 파는 곳을 찾았다. 평소에 지나가며 간판만 보던 곳인데 들어가 보는 건 처음인 카페였다. 여기 이런 게 있는 줄은 오 년 전부터 알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는 곳. 프랜차이즈 카페라 분위기가 너무 떠들썩하진 않을까 약간의 걱정을 안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웬걸, 너무 좋았다! 적당한 음악과 적당한 인구 밀도, 거기다 코로나 때문에 전 좌석에 투명 칸막이가 설치되어 답답하지 않으면서 개인 공간이 확보되는 1인 고객을 위한 최적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카드 주문은 키오스크로 하기에 점원과 대화를 할 일도 없어 사람들의 말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고, 실내의 조명은 너무 밝지도 너무 어둡지도 않아 머무르기에 딱 좋았다. 공부를 해도 책을 읽어도 좋을 것 같았다. 딱이었다.


음료를 기다리는 몇 분간 자리에 앉아 카페를 둘러보니 ‘컨디션이 조금 괜찮으면 여기에 와서 책 좀 읽다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집 밖에 나오는 것만도 어려운 날이 많지만, 그냥 카페에 앉아 있는 건 그래서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책을 읽거나 글을 쓰기에 완벽한 카페를 발견했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몸이 나쁘지 않은 어떤 날 시도해 볼 위시리스트에 한 줄을 더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큰길 하나 건너 번화가로 진입하는 데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 길만 건너지 않으면 집 근처라 힘들면 언제든 집으로 뛰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횡단보도 하나가 너무 멀게 느껴졌다. 그 길을 건너 오늘의 병원까지 가는 건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나의 한계치였다. 볼 일이 끝나고 방향을 틀어 새로운 카페에 가본 것은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집 안에만 있다가 집 주변만 돌다가 다시 집에만 있던 나의 세계가 아주 조금 확장되었다. 나는 내가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믿게 되었다.


며칠 전의 운동 중에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내년 봄엔 광교* 보내는 게 목표니까요.

봄이요? 그렇게 빨리요?


(광교*: 첫 번째 장거리 이동 목적지. 이유는 다른 글에서 적기로 한다)


한 4시간 정도 일상생활 무리 없게 하는 거죠.

우와, 지금은 뭐 하나 하면 쉬어야 되는데.


일단 1시간 일상생활은 할 수 있게 만들어야죠.

우리 지금 이거 대단한 거 하는 거 아니에요.

일상생활하려고 하는 거예요. 남들 다 하는 거 그게 안 되는 거잖아요.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몇 달 전쯤엔 정말 작은 단기 목표를 적어보라고 했었다.


그냥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거 있잖아요. 남들이 듣기엔 아무것도 아닌 거.

걸어서 이마트 가기? 카페 가서 한 시간 책 보기?

네, 그런 거요.


단기의 단기의 단기 목표를 세웠던 봄날이 있었는데 그것에 가까워지는 데 많은 계절이 지났다.


카페에서 책을 한 시간이나 읽을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북 스탠드도 없고,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플 테니까. 그래도 어느 날 카페에 가는 외출에 성공했다면 그곳에 앉아 단 십여 분만이라도 불편하지 않게 쉬다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건 새로운 성취인 거다. 아픈 이후의 내가 해보는 첫 성취. 아무 목적 없이 그저 나를 위한 외출을 해보는 것, 그러니까 그게 나에겐 3년 만이려나.


병원을 가기 위해선 나갔다. 재활운동을 하기 위해선 나갔다. 장터에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의무와 좁은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나의 사이클에 오늘처럼 조금씩 예외가 생기는 것을 앞으로 나는 흐뭇하게 바라볼 것이다. 나를 둘러싼 원이 커지고 커져 내년 봄엔 광교에 가고 또 언젠간 제주도에 가고 그 언젠간 물속을 맘껏 휘젓는 미래를 믿을 것이다. 나는 나의 미래를 믿는다. 믿지도 않는 자에겐 곁도 내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어제 편두통으로 엉엉 울었건 우울의 바다에서 헤엄쳤건 나는 앞으로 간다. 나를 믿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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