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 속에 던져진 국민학생
"땍띠야 밥 줘"
TV 드라마 '여로'에서 극 중 남편인 영구가 주로 하던 말이었다.
'여로'는 10월 유신이 있던 72년에 방영되었는데, 국민학교 입학 1년 전이었다. 여로의 시청률은 70%로 전 국민의 뜨거운 관심사였고, 드라마 방송시간엔 거리가 한산했다.
바보 남편 역의 장욱제, 혹독한 시어머니 역의 박주아, 아내와 며느리 역의 태현실이 주인공이었다. 아들 역할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송승환이 맡았다. 표독한 시어머니 역할을 했던 박주아는, 드라마와 현실을 분간 못하는 시청자들에게 가끔 봉변을 당했다.
현실과 TV 방송 세계를 구분하지 못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TV 속 배우들이 나를 못 본 척 말을 하고 있다고 여겼고, 탤런트 태현실에 빠져들었다. 어느 날 남몰래 브라운관에 쪼~옥 뽀뽀를 했다. 딱딱했다.
다음 해 73년 남정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운동장에 줄을 서서 노래와 율동을 따라 했다.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이를 닦자 웃니 아래 이 닦자♬"
코 흘리는 아이들이 왜 그리 많았는지~ 내 왼쪽 가슴에도 하얀 손수건이 옷핀에 꽂혀 있었다. 손수건을 단 것은 사실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입학 전 만화방에 갈 때 몰래 달았으니까.
그땐, 글자도 모르는 놈이 그림만 보러 왔냐고, 만화방 주인이 딱하게 볼 것 같았다. 하얀 손수건을 달고 갔지만, 까막눈이었으니, 만화책의 그림만 열심히 봤다.
만화책 비행기 공중전 장면엔 손에 땀이 났다. 뒤에서 쫓아오는 적기를, 국군 비행기는 다리 밑으로 유인했다. 다리를 지나자 뿌앙~ 가속하면서 위로 솟았다가, 360도 거꾸로 돌아 적기 꽁무니를 따라잡았다.
"드드드득. 드르륵. 드르륵."
기관포에 맞은 적기는 추락했다. 와우~
적기를 격추했지만, 국군 비행기도 결국 기관포에 맞아 불시착했다. 부상을 당한 조종사는 몰려오는 지상 적군을 향해 비행기를 밀어 힘겹게 돌려놓았고,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향해 날개에 달린 기관포를 발사했다. 적군을 제압하는 듯하다, 적의 총탄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럴 수가~
액션 만화에 글자가 무슨 필요가 있담!!
이제 국민학생이 되었으니 하얀 가제 손수건은 눈치 보지 않고 떳떳이 달았다. 코 닦는 손수건이긴 했지만 문맹을 벗어나고 있다는 표시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코흘리개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라 오래 달지는 않았다.
엄마 없이 혼자 등교하던 날, 아빠 포마드를 몰래 머리에 바르고 가르마를 타고 튀어 나갔다. 지독한 냄새가 내 코를 후벼 팠다. 그 냄새는 100미터 밖의 코도 찔러댈 것 같았다.
학교에선 남자애들이 '너 포마드 발랐지?' 하며 놀렸다. 번득거리는 머리, 자극하는 냄새와 애들의 손가락질에,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하는 자책이 나를 고문 인두로 지져댔다. 하루 종일.
이보다 더한 일도 당했다. 겨울이 다가오자 외할머니와 엄마는 모자 달린 초록색 털코트를 사 오셨다. 단추가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달린 것을.
"에이~여자 꺼야. 안 입어." 나는 짜증을 냈다.
"아유~좋네. 눈밭에서 굴러도 되겠다." 외할머니가 말했다.
눈밭에서 구르긴? 여자 꺼야~ 말해봤자 이미 사 온걸. 다음날 그냥 입고 학교에 갔다.
아~ 정말~우리 반 여자애가 똑같이, 그 문제의 초록 코트를 입고 왔네.
초록 코트를 입은 그 여자애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애와 나는 서로의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런 우리를 쳐다보는 애들의 따가운 시선.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남자애들. 또 뭐라 변명하나. 포마드 사건 이후 두 번째네.
고개를 숙여 내 옷을 확인해 보았다. 조금이라도 그 애 옷과 다른 점을 찾아봐야지. 털이 달린 모자 색깔까지 똑같네.
"엄마~이 것봐. 이게 뭐야.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 속으로 소리를 질러댔지만, 무슨 소용.
그 여자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떨군 채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내 얼굴은 화끈화끈, 등에선 땀이 몽골몽골, 머리에선 창피한 수증기가 하늘하늘 올라갔다. 땀이 식으면 덜덜 떨렸고, 내 손바닥이 닿은 공책은 젖었다.
더욱 큰 문제는 내일도 모레도 이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수많은 시선을 또 마주해야 한다는 것. 수군대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뻔뻔한 얼굴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함을 지어 보여야 한다는 것. 속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면 써야 한다는 것.
겨울방학 전까지 이렇게 신경을 쓰면, 에너지가 남기는 할까.
놀려대고 있을 시선을 방어하려, 나는 안간힘을 썼다. 실제로 여자 옷을 입었다고 놀려대는 짓궂은 남자애들은 없었지만, 나는 가해자가 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애들은 겉으로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뭐라 놀릴까. 초록 코트를 입은 그 여자애는 자신이 피해를 봤다고 한을 품고 있겠지. 내게 따지지는 않지만, '당장 그 옷 벗어라'하는 말을 참고만 있을 거야. 무심한 듯 하지만, 화가 났을 거야.
미안해. 내 잘못은 아니야. 어른들 잘못이야. 나도 너처럼 피해자야. 이해해줘. 그렇지만, 미안해. 어떡해. 몰라.
나는 이런 생각에 잠 못 자고 끙끙 앓았다.
"게다가 한혜진은 또,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직 내 속에 들어있는 한혜진의 눈도 쳐다볼 수 없네. 이 웬수~초록 코트.
국민학교 인생은 고통이구나.
타인의 시선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지옥.
겨울아 달려라.
초록 코트 벗어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