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표심 Sep 16. 2022

1학년, 나는 살겠네. 태양만 비친다면

햇살이 비치는 풀밭은 지금도 행복의 나라

-돈걱정

  돈이 없다. 집에 돈이 없다. 그럼 어떡하나. 


  국민학교 1학년인 나는 집안 걱정을 했다. 엄마 아빠의 대화 속에서 들려온 돈이 없다는 소식은 복음(good news)이 아닌 걱정거리(bad news)였다.


  내가 5살이던 1970년은 11월에 전태일 분신사건이 있던 해였다. 그 해 은행 직원이었던 아버지는 대출사고로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았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 나가던 부모님에게는 피 말리는 사건이었다. 2년이 흐르면, 그 상처는 모두 아물게 될까. 아니면 먹고살기 위해 바위보다 무거운 빚을 더 안게 될까.


  7살이 되던 1972년 8월 3일에는 연평균 46%에 달하는 기업 사채를 동결하는 '8·3 긴급경제조치'가 취해졌다. 또 10월에는 시월유신(十月維新)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대통령이 의장인 통일주체 국민회의가 만들어졌다.


  세상은 이렇게 소용돌이쳤고, 우리 집은 언제나 돈 걱정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따라 울었다

  4월이 생일인 나는, 8살인 1973년에 취학통지서를 받았다. 국민학교 1학년이 된 그 해 10월엔 4차 중동전쟁과 1차 오일쇼크로 한국 전체는 몸살을 앓고 있었다. 세상은 우호적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어른들이 하는 소리엔 언제나 귀를 쫑긋 세웠지만 못 들은 체했다. 그래야 어른들이 안심하고 속마음을 털어놓을 것이니까.


  어른들을 위한, 교회 부흥집회에서도 부흥강사들의 설교를 한눈팔지 않고 들었다. 그들의 눈물 짜는 감동적 설교 어느 부분에서 교인들이 '아멘'하는지 쳐다보았다. 부흥강사들이 얼굴을 움찔움찔하고 목소리를 울컥울컥 하는 모습을 보이면, 동화된 청중은 최면에 걸린 듯 함께 울었다.


  나도 울었지만, 그 이후로는 울음이 어떻게 모인 사람들에게 전염되는지 생각했다.


-소풍 안 갈래

  부흥강사 설교 결론은 자주 헌금이었다. 하나님은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었으니, 은혜를 입은 빚진 인간은 소중한 재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음향시설을, 기다란 의자를 마련하였고 건물을 짓기도 했다.


  나는 돈이 없었으니, 헌금 바구니를 돌리는 순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나는 어른들의 세상을 대부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내가 어려서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 

  못 들은 척, 안 들은 척, 딴짓인 척. 

  그게 내 전략이거든.


  나는 고개와 몸통을 반대로 했지만, 귀는 어른들의 목소리 하나하나를 잡아들이고 있었다. 


 국민학교 1학년이 되자 집에 돈이 없다는 얘기가 자주 들렸다.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할까.


  "엄마, 학교에서 소풍 간다는데 난 안 갈래"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배도 아프고, 머리도 아파. 안 갈래"


-잔디밭은 행복이었다

  나는 끝까지 우겼다. 김밥을 싸야 하는데, 돈이 들기 때문이다. 음료수와 과자를 사야 하는데, 돈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국민학교 1학년 1학기 첫 소풍은 가지 않았다. 


  2학기가 되고, 또 가을소풍을 간단다. 이 때는 내가 엄마에게 졌다. 엄마와 외할머니까지 남산 소풍에 함께 따라나섰다.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을 가져오지 않은 담임선생님과 함께 김밥을 먹었다.


  어린이회관 앞 넓은 잔디밭은 아직 풀색이었다. 하늘은 푸르고, 밝은 날이었다. 잔디의 밝은 초록색 잎은 햇빛을 반사했다. 저 끝 땅에서 시작한 하늘은 위로 올라갈수록 맑고 진한 파란색을 하고 있었다. 왼팔 오른팔엔 살랑살랑 바람이 닿았고, 윗바람은 구름을 끙끙대며 밀었다. 구름의 상층부는 흰색으로 환했고, 아래쪽엔 어두운 흰색이 여기저기 섞여 입체감을 띠었다.


  햇빛은 좋다. 잔디를 환하게 만들고, 구름을 하얗게 만드니. 내 마음도 밝아진다.


-광합성

  옷은 가을 햇볕에 살짝 따끈했고, 반팔을 삐져나온 살갗은 최대한 광합성을 했다. 봄보다 자외선 지수가 낮았기에, 내 몸은 놓칠세라 비타민D와 평온을 주는 세로토닌(serotonin, sero=흐르는 액체, tonin=길게 뻗어 늘어진 )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광합성은 마음에서도 이뤄지는 걸까. 나를 감싸는 햇빛에 싸여, 잔디 위에 한 동안 서 있다 발을 뗐다. 스드득~ 스드득~ 잔디 밟히는 진동이 운동화 바닥을 타고 다리로 올라왔다. 


  딱딱한 맨땅이 아닌 미세한 울렁임을 간직한 땅. 

  스프링 같은 잔디가 받쳐 주는 땅. 

  게다가 초록색인 땅.


  태양이 빛다발을 뿌려주는, 드넓게 펼쳐진 푸른 잔디는 걱정이 발 딛지 않는 세계였다. 


  영원한 것은 없는 법. 


그런 찬란한 시간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구름아 걷혀라

  빛을 반사하던 구름은 어두운 밑바닥을 크게 보이며, 서서히 밀려왔다. 따뜻한 태양의 온도는 숨어 버렸고, 마음은 어두운 회색으로 휘청거렸다.  태양은 얼굴을 빼꼼 내밀었지만, 희고 어둑한 손으로 얼굴을 자꾸 가리웠다.


  아. 이거 왜 이럴까. 

  구름이 태양을 스르르 막아서니, 내 마음 빛이 사라지는구나. 

  어두침침한 기분, 울적한 마음은 어디서 온건가.

  마음이 헛헛하고 구멍이 푹 뚫렸구나. 

  구름아 어서어서 갈 길을 가거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호루라기 소리와 반 아이들의 모여라 소리가 들렸다. 모여든 우리 반은 술래 두 명에 산토끼 노래를 부르며 손수건 돌리기 놀이를 했다. 놀이에 정신이 팔리니, 어둑했던 내 얼굴에 웃음이 밝게 피어 올라왔다. 


  엉덩이로 이름쓰기 벌칙을 받은 내가 엉덩이를 이리저리 움직이면, 애들은 소리 지르며 재미있어했다. 그 소리를 키우려고, 나는 더 요란한 몸짓을 했다. 


-애늙은이라고?

  웃긴 나를 보여준다는 것. 애들의 마음을 흔들어 웃길 수 있다는 것. 내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내가 그들을 행복의 나라로 데려갈 수 있다는 것. 내 속에 살고 있던 다른 나를 발견하는 기쁨~ 


  태양빛을 잃고 방황하던 시공간은 자취를 감추었고, 몸을 이모양 저 모양 흔들며 만들어낸 웃음은 마음에 빛을 다시 만들었다.


  국민학교 1학년 첫 소풍을, 돈 걱정하느라 가지 않았다는 얘기를 아내에게 말했다. '성숙한 아이였구나'라는 말 대신, '당신 애늙은이였구나' 하는 옆구리 찌르는 소리만 돌아왔다.


  애늙은이로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나의 어릴 적 캐릭터를 좋아한다. 웃음이 나오고, 공감할 수 있다. 남들의 평가야 어떻든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보면서 좋아하게 되었다. 그림자 속의 나, 빛 가운데 있던 나를 봐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장막을 걷어라

  몇 달이 지나, 외가댁 친척들과 함께 큰 이모 댁에 놀러 갔다. 그곳엔 고3인 사촌 큰형의 방이 있고, 그곳은 신세계였다. 자동 턴테이블이 올려져 있는 외발 탁자, 외국 여자 가수 브로마이드가 걸린 방문,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성경구절이 쓰인 페넌트 그리고 통기타 한 대.

  

  그곳을 다녀오면서, 입에서 흥얼거리게 된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이 노래 앞부분부터 나에게 박차고 세상으로 나가라고 명령을 해댔다. 암막을 걷고, 창문을 열어젖히고 바람을 느껴보잖다. 


  이야~ 이 것이 선진 세계의 어법인가 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 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소풍 광경이 노래에 담기다니

  게다가 내가 소풍 때 보았던 풀밭이 펼쳐진다. 나를 가볍게 떠받쳐주던 그 풀밭 위로 걷게 해 주세. 


  '걷게 해 주세'라니~ 이런 말도 다 있는 거야? 역시 앞서가는 노래는 다르다니까.


  남산 소풍에서 어둡던 내 마음, 울고 웃고 싶었던 내 마음이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 거야. 내 마음을 만져 달라니. 남에게 마음을 만져달라고 할 수 도 있어. 놀라운 일이야.


  "아하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비와 천둥이 와도 태양은 언젠가 비치는데, 그 태양만 비치면 살겠다니~ 그래, 태양이 없으면 살기 힘들지. 그런데 태양은 언제나 있는 거잖아.

 

  내 눈에 

  내 얼굴에 

  내 마음에 

  빛이 비치니 

  나는 살아났네.

  이 세상엔, 내 마음이 담긴 노래도 있구나.



  장막이 막아서고

  창문이 가리우지만

  너머엔 바람이 산들거린다


  느끼고 싶은가

  그럼 열어젖혀라


  풀밭은 가볍다

  나의 몸도 가볍다 


  소리가 듣고 싶은가

  울고 싶은가

  웃고 싶은가


   비가 온다고?

   천둥이 친다고?


   그럼 춤을 추자


   나는 살겠네

   태양만 비친다면~




[촬영장 스케치] '옥상달빛 - 행복의 나라로'♬ 김제동의 톡투유

https://youtu.be/5C6vq7uYoms

옥상달빛 - 행복의 나라로


이전 05화 1학년, 뽀뽀하고 포마드도 바르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