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 오셨을 때 선생님 앞에서 한 마디 했다. 안명진 담임선생님은 잘 생겼다. 배우 김명민 비슷한 이미지였다. 잘생기셨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웃어넘기셨고, 엄마는 다과를 내왔다.
입학 초기엔 이름만 겨우 쓸 줄 알았다. 어른들이 내 손을 부여잡고, 서로 어쩔 줄 몰라하며 연습한 이름이었다. 삐뚤빼뚤 겨우 썼다. 어른들은 어찌 그리 잘 쓰는지 신기했다.
지금도 글씨 쓰는 게 힘들다. 손으로 쓸려면, 예쁘게 써지지 않아 가슴에서 뭐가 치밀어 오른다. 펜을 잡은 손은 굼뜬다. 잔뜩 힘이 들어간 손동작과 안 예쁜 필체는 고치기가 힘들다. 어쩌다 수직획만이라도 똑바로 그어 봤다. 조금 예쁜 글자가 만들어졌다. 보기 좋게 개선된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예쁜 것은 좋은 것.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칠판에 쓰인 'ㄱ, ㄴ, ㄷ...'을 종합장에 색연필로 따라 그렸다. 후에 배포된 국어책 안의 '나, 너, 우리,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따라 그렸다. 직전해가 '10월 유신'이어서 나라와 대한민국이 중요했나 보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방과 후 아파트 복도 난간에서 어떤 동네 아이가 말했다.
"너, 책, 읽을 수 있어? 못 읽지?"
"아니야, 이리 줘봐"
어디서 났는지, 3학년 국어책이었다. 큰 소리는 쳤지만, 내가 정말 읽을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책을 읽었다. 맞는지 틀리는지 몰랐다. 놀림이 싫어 오기를 부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 아이는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다.
휴우~ 다 맞았나? 그 아이도 뭐가 맞고 틀렸는지 잘 몰라서였을까? 그때부터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문맹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은 나에 대한 믿음이 생긴 첫 번째 날이었다.
-한혜진은 숨과 똥도 좋다
한혜진은 반에서 최고로 예뻤다. 그 아이 가방도 예뻤다. 크레파스도 그 아이 것은 사랑스럽고 좋았다.
"그 아이 짝은 얼마나 좋을까~"
"무슨 복이 있어서 쟤와 짝을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쟤랑 떨어져 있는 거지?"
한혜진은 단발머리였지만, 얌전하고 얼굴과 옷에서 빛이 났다. 단, 머리 뒷부분은 납작했다. 얌전히 누워 엄마 말 잘 들은 착한 애기였나 보다 했다.
집에 와 누우면, 한혜진 생각이 났다. 그렇게 예쁜 여자아이가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니~ 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세상에 요정이 사는 줄 잘 몰랐는데. 한혜진이 숨을 내쉬겠지? 내쉰 숨을 나도 받아 들이마시겠지? 그렇게 되면, 좋겠네. 혜진이가 숨 쉬는 이 우주는 좋은 곳이야~
한혜진이 똥을 싸놓아도 예쁠 것이라 생각했다. 상상 속의 그녀의 똥은 냄새도 풍기지 않는 것이었다. 빛나고 좋은 똥이었다.
-어른이 되고 싶다
빨리 어른이 돼야 걔와 결혼할 수 있는데, 어린 나이라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 생각하면 자주 어른이 부러웠다.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뽀뽀도 하고, 눈치 안 보고 좋아할 수 있을 텐데. 어린 나이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불편했다. 자유를 박탈당한 죄수라 할 수 있을까?
혜진이는 한 씨이고, 예쁘다. 한 씨라서 예쁠까? 당시 미(美)의 여신은 tv 속 한혜숙이었으니, 한 씨라서 예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내 성씨는 왠지 좀 없어 보였다.
국민학교 1학년이던 1973년 5월 5일 어린이날. 이 날은 토요일이었고, 법정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교에 갔다. 토요일은 오전 수업만 하니 즐겁기도 하고, 예쁜이와 빨리 헤어져야 하니 슬프기도 했다. 이 날엔 특별히 엄마들이 교실에 들어와 색연필, 종합장, 책받침, 연필, 지우개 등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뒤풀이.
-기회는 내가 만든다
엄마들은 학교 앞 2층 중국음식점에 모였다. 애들은 자동 딸려갔다. 한혜진 엄마도, 우리 엄마도 함께 있었다. 소화제를 사 오는 심부름이 내게 떨어졌다. 이때가 혜진이를 납치할 절호의 기회였다.
"엄마, 한혜진과 다녀올게요~"
"응, 그래~"
한혜진 엄마가 있는 데서 공식 허락을 얻었다. 역시 사람은 한 마디라도 해야 한다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되든 안되든, 원하는 것을 요구해야 한다.
Knock and the door will open
Seek and you will find
Ask and you’ll be given
음식점 계단을 다 내려 와선, 혜진이 손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손잡는 이유를 분명히 했다.
"혜진아, 약국까지 손잡고 뛰어갔다 오자~"
-토요일은 낮이 좋아
내 마음은 복음으로 가득 찼다. 5월의 토요일 부드러운 햇살을 받은 혜진의 얼굴은 햇빛보다 더 밝은 빛을 반사했다. 요정인가, 천사인가, 여신인가...
기쁨은 강렬해졌지만, 그것을 오래 소유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도 그림자처럼 강해졌다. 기쁨이 온 후에는 슬픔이 오는 걸까? 기쁨의 친구는 슬픔일까. 혜진이 함께 했던 시간이 빛날수록 맘 속 어둠은 짙어졌다. 다시 돌아와야 하는 길은 왜 이리 짧은지.
오른 손엔 약봉지를 들었고, 왼 손은 아직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기쁨보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점차 무게를 더해 갔다. 혜진이는 아직 내 손을 잡은 채였다. 그 손이 떨어질까봐, 손에 힘을 넣었다.
그녀와 한 공간에서 오래 있으려 했지만, 담소를 나누던 엄마들은 자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엄마 조금만 더 있다 가면 안돼?"
이런 말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싶었지만.
-기쁨의 친구는 슬픔
토요일. 기쁨의 태양은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슬픔의 토요일로 얼굴을 바꾸었다. 기쁨은 순간이고, 허전한 마음은 오래 지속되었다. 도대체 토요일은 즐거운 날일까 슬픈 날일까.
그 후 5학년 1977년 8월 20일 토요일도 슬픈 날이었다. 여름방학으로 뛰어놀던 토요일 늦은 오후, 동네를 배회하다 전파상에 전시된 tv에서 만화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린이날 특집 mbc 만화영화 인어공주가 끝나가는 중이었다. 집에 가면 막을 내릴 테니 서서 tv에 빠져들었다.
왕자와 마리나 인어공주가 탄 커다란 배가 물결 위에서 출렁거리고 있었다. 만화였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진 공주는 본 적 없었다. 공주와 왕자는 맺어져야 한다. 사랑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그 순간 나는 왕자였고, 사랑스러운 눈망울을 가진 공주를 원했다.
그렇지만,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자는 마리나 대신 이웃나라 공주를 사랑하여 결혼하게 되고, 비극으로 치닫는다. 마리나는 자신을 구원할 칼을 버렸다. 왕자를 살리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아름다운 그녀는 물결 속 물거품이 되어 한 없이 하늘로 올라갔다.
내 마음속 공주는 사라졌다. 이 세상에 없다. 더 이상 그녀를 볼 수 없다. 마리나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날. 이 날도 토요일.
-잊어야지
내 마음을 가리고 있던 구름 색깔은 더욱 어둑어둑해졌다. 토요일의 사랑은 왜 이리도 힘든 것일까? 왜 사랑하는 사람끼리 토요일이라도 함께 오래 있으면 안 되는 걸까? 태양도 떠 올라 있는 밝은 토요일인데, 왜~ 이렇게 슬픈 거야.
인어공주는 어린이 명작동화 아니야? 그런데 내 어린 가슴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거야? 사는 게 이런 거야? 이야기를 왜 이렇게 만든 거야? 그리고 왜 또 토요일인데. 도대체 누구야~ 가슴이 먹먹했다.
그나저나 내 가슴을 흔들어 놨던 한혜진을 어떻게 잊어버리게 된 걸까. 인어공주 이야기의 왕자처럼 내게 다른 여자가 생겼던 걸까. 1학년 2학기에 우리 반에는 한혜진이 바지에 오줌을 쌌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일까. 그래서 한혜진이 똑똑한 아이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어서일까. 소문이 돈 이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더 이상 잠자리에 누워 한혜진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똥도.